최근 재계의 가장 큰 화두는 구조조정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금산분리를 무력화시키고,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고, 잠실롯데월드의 초고층 빌딩을 허용하는 등 친재벌·친기업 정책을 강하게 구사해 가던 현 정권이 지금은 전체 재계를 향해 구조조정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이 같은 돌변에 대해 재계는 반발하기는커녕 꿀 먹은 벙어리이다. 이는 재벌 대기업의 건전성 및 재무 상황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기업회생을 위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 ■현금성자산 10조 넘는 곳 삼성그룹뿐 2007년 말부터 시작된 국내외적 경제위기에 직면한 우리 기업들은 혹독한 환경을 겪으며 기업의 기초체력이 한없이 약해졌다. 이는 삼성그룹·현대기아자동차그룹 등 일부를 제외한 10대그룹과 중견 재벌그룹 전체가 모두 포함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선 현금성 자산만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시가총액 기준 국내 10대그룹 중 현금성 자산이 10조 원을 넘어서는 곳은 13조4000억 원의 삼성그룹 한 곳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전년 대비 1.5% 낮아진 수치이다. 삼성을 제외한 기업집단의 경우, 현대차 8조6000억, 현대중공업 6조4000억, LG 3조, SK 2조6000억, 금호아시아나 1조3000억, GS 3조6000억, 한화 2조3000억, 롯데 2조, 한진 1조2000억 원 순이다. 이를 계열사당 평균으로 나눌 경우, 현대중공업그룹이 9143억 원으로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그 외, 현대자동차의 계열사별 평균 현금성 자산이 2389억 원을 기록했으며, 그 다음으로 삼성 2271억, LG 1903억, 금호아시아나 1026억, SK 983억, GS 750억, 한화 677억, 한진 480억, 롯데 455억 원을 기록했다. 현금성 자산이란 순수한 현금을 뜻하는 것으로, 회사 금고에 보관된 현금과 수표, 혹은 금융권 예치금, 양도성예금증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은행 금융권은 해당 기업의 현금성 자산이 2년 이상 연속 감소할 경우 대출금 조기회수 등의 조치에 착수해 왔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GS그룹은 상위 5개 계열사가 평균 6480억 원의 현금율 보유한 반면, 나머지 43개 계열사의 보유현금은 평균 84억 원에 그친다는 것이다. 또 삼성은 전자·생명·물산 등 상위 6개사가 평균 2조100억 원 상당의 현금보유액을 자랑한 반면, 53개 계열사는 평균 253억 원의 현금보유액에 불과하다. 특히, 롯데그룹은 올해 신동빈 부회장의 후계승계 완료, 서울 잠실의 초고층 빌딩 건립 등의 일정을 앞두고 천문학적인 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지만 롯데그룹의 2008년 결산 결과 현금성 자산은 2007년 결산시점 대비 4.8% 감소한 2조 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부채비율은 금호아시아나와 롯데를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10대그룹 중 부채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한진그룹으로 278.7%를 기록했으며, 그 다음은 금호아시아나 169.1%, 한화 165.5%, SK 118.8%로 그 뒤를 이었다. 한편, 한진그룹의 부채비율이 2007년 대비 가장 높게 올랐고, 한화가 28.6%p, SK, 25.9p%, 삼성 18.6p%로 그 뒤를 이었다. ■10대 이하 그룹 심각성 더해 2007년 대비 부채비율이 87.9%p 급증한 한진그룹은 현금성 자산 감소율도 10대 그룹 중 가장 높은 것으로 기록됐다. 이들 기업은 국내에서 가장 돈이 많은 기업집단의 경우. 한편, 이들보다 못한 중견재벌그룹과 상장사 하위 500대 기업의 경우 그 정도가 심하다. 사실 중견재벌그룹의 현금소진 문제는 지난해 내내 증권가의 이슈로 떠올랐다. 코오롱의 경우 지난해 3분기 코오롱패션의 보유현금이 1000만 원, FnC코오롱은 3000만 원에 불과했으며, 주식회사 코오롱도 유동자산이 유동부채의 46.6%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또 동양매직·한진 등도 비주력 계열사의 현금소진 현상이 심화됐었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 같은 현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앞으로 2~3개월이 고비”라고 밝혔다. 한편, 명동과 여의도 일대 사채시장의 한 관계자는 “코스피 상장사들 중 상당수의 경영진들에게 대출타진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코스피와 코스닥 상장사들 중 상당수 기업들이 하루하루 운영자금이 없어 피를 말리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명박식 구조조정 이는 현 정권이 재계를 향해 칼날을 뽑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고 있다. 기업들 간의 엄격한 구조조정 등을 통해 건전성을 높이지 않은 상태에서 어설픈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을 사용했다가는 자칫 국가경제의 도산이라는 최악의 사태도 내다볼 수 있기 때문. 그러나 기업 간 구조조정은 스스로 이루기는 힘든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재계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는 주체로 금융위원회를 선정했다. 금융위원회는 산하 은행들의 주채무계열 재벌기업들의 구조조정 진행과정을 감독할 예정이다. 정부 당국자들에 따르면, 앞으로 시작될 구조조정은 10여 년 전 재벌 빅딜로 표현됐던 당시에 비해 강도 면에서 모자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은행이 주채무게열 재벌그룹 계열사들의 구조조정을 진행하면, 그 실적을 금융위원회가 평가하여 향후 은행들의 감독에 차등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10여 개 재벌그룹들이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뽑은 칼날은 IMF 외환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뽑은 칼날과 대비된다. 재벌 빅딜이라고 불리운 당시 구조조정은 재계의 반대를 일축하며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일례로, LG그룹의 구본무 회장은 LG전자의 반도체사업 부문을 현대전자에 강제 매각하는데 대해 심하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헌재 경제부총리와의 단독면담에서 그룹의 존립까지도 포함된 강력한 경고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구 회장은 당시 전경련이 김대중 정권의 목소리를 대변해주지 않은 데 대한 서운함으로 10여 년 간 전경련 회장단 행사에 일절 참여하지 않아 왔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권력을 위임받아 구조조정을 지휘한 장수는 이헌재 경제부총리. 당시 이 부총리는 재계의 원성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과 반항하는 기업들의 피를 묻히는 등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열정을 쏟아 은행 및 재벌그룹의 빅딜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이는 결국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빨리 IMF를 조기 졸업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