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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이슈]DJ-YS, 반세기만의 ‘병상화해’

애증과 반목으로 점철된 정치역정…한국 정치사의 두 거목 역사적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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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31호 심원섭⁄ 2009.08.18 13:41:27

한국 현대사의 두 정치 거목인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애증과 반목으로 점철된 반세기 동안의 구원(舊怨)을 훌훌 털어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5분밖에 안 걸렸다. YS가 8월 10일 오전 병세가 위중한 DJ를 찾아가 병문안을 함으로써, DJ가 98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두 사람의 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이후 10여 년 만에 극적으로 반전된 것이다. 물론 그 사이 전직 대통령 초청행사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그리고 지난 5월 29일 경복궁에서 거행된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등에서 조우한 적은 있었지만, 대통령 후보 단일화 협상이 실패로 끝난 87년 때처럼 서로 외면한 채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 11월 DJ가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 YS가 병문안 전화를 하고, 지난해 10월 YS의 부친인 김홍조 옹이 별세했을 때 DJ는 전화를 걸어 애도를 표시했지만 의례적인 인사 수준에 그쳤으며, 이번에도 DJ가 폐렴이 악화돼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던 지난달 17일 YS가 비서진을 보내 “조속히 건강을 되찾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8월 10일 오전 10시 5분, 검은색 에쿠스 차량이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고, 곧바로 차 뒷문이 열리면서 YS가 걸어나왔다. 기자들이 에워싸자 YS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DJ는) 나하고는 가장 오랫동안 경쟁하면서 동시에 협력해온 사이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특수한 관계다”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이희호 여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YS “DJ와 나는 오랜 동지였다” 한 달 가까이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DJ를 대신해 부인인 이 여사가 YS를 맞았지만, YS는 개의치 않고 DJ를 ‘김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나와 김대중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다. 협력도 오랜 기간 했고, 경쟁도 오랜 기간 했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나라는 아마 미얀마처럼 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 여사는 “직접 방문해주셔서 감사하다. 대통령이 주무시고 있는데 깨어나서 김영삼 대통령이 다녀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굉장히 위로가 될 것이다”라고 화답했다. 그러자 YS는 “집사람(손명순 여사)과 함께 오려고 했는데 저만 왔다. 집사람도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병간호하시느라 수고가 많다”고 하자, 이 여사는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전했고, YS는 이 여사에게 “모든 세상에 기적이란 게 있으니 최선을 다해 달라”는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다. 15분 뒤 어두운 표정으로 병원을 떠나려는 YS를 다시 기자들이 에워싸자, YS는 재차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라고 강조했으며, 곧 이어 “이번 방문을 DJ와의 화해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제 그렇게 봐도 좋다. 그럴 때도 됐고...”라며 화해를 공식화했다. YS는 최근 지인들에게 DJ의 와병에 대해 “감회가 교차한다”며 “우리가 한국의 민주화·정치에서 제일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DJ 역시 1990년대 초반 야당 정치인 시절 “내가 죽었을 때 제일 슬피 울 사람이 김영삼 총재이고, 김영삼 총재가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피 울 사람이 이 김대중”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마디로 말해, 두 사람은 평생을 경쟁과 반목을 거듭하면서 한국 정치를 대표하는 라이벌이었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두 사람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갈라서면서 각각 평화민주당(DJ)과 통일민주당(YS)을 만들었다. 이후 두 사람은 반목을 거듭했고, 90년에 YS가 3당 합당을 하면서 서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지만, 이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이 됐으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고, 심지어 YS가 DJ를 향해 “네로 같은 폭군”이라고 부른 일까지도 있었다. 영호남 두 정치 거목의 역사적 화해 뿐만 아니라, DJ는 문민정부 시절 집권을 위해 YS를 가차없이 공격했고, YS는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리면서 반격을 가했다. 특히 YS의 차남 현철 씨의 사면문제는 둘의 관계를 회복 불가능하게 만든 계기였다. 97년 DJ의 비자금 의혹에 대해 YS는 수사유보를 결정해 민주화 동지에게 대선 승리의 길을 터줬으나, DJ는 2000년 8월에 가서야 현철 씨를 사면하는 바람에 YS는 DJ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DJ가 이명박 정부를 독재로 규정하자, YS는 “그 입을 닫아라”라고 독설을 퍼부을 정도로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YS가 승부사답게 전격적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은 현철 씨가 “더 늦기 전에 화해하실 때가 됐다”며 꾸준히 아버지를 설득했고, 서청원·김덕룡 전 의원, 김무성 의원 등 과거 DJ의 동교동계와 민주진영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상도동계 인사들도 화해를 적극 권유하는 등 주위의 설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이이기에 두 사람의 주변에서는 “더 늦기 전에 인간적인 화해를 하라”는 권유가 많았으며, 실제로 YS도 8월 10일 아침 배드민턴을 치다가 “고비에 있는 거 같다. 언제 가실지 모르니까 가자. 그래도 보는 게 안 좋겠느냐”며 DJ 방문을 결심했다고 한다. 사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경쟁 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 등 군사정부와 싸우면서 두 사람은 협력자였으며, 두 사람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성장했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다. 두 사람은 68년에 야당인 신민당의 원내총무 경선에서 처음 맞붙어 YS가 이겼었다. 그러나 70년에는 YS가 40대 기수론을 내걸며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고, 역시 40대인 DJ도 도전한 결과 DJ의 승리였다. 80년대 중반의 민주화 운동, 87년 직선제 개헌 투쟁에서도 두 사람은 맨 앞에 서서 함께 투쟁하기도 했다. 따라서 역사에 기록될 YS와 DJ의 8월 10일 ‘병상 화해’는 무엇보다 동시대를 살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착근과 국가 선진화를 이끈 영호남 두 정치 거목의 역사적 화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한편,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 인사들의 연합체인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두 사람의 화해를 적극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후속작업에 돌입했다. 민추협은 8월 11일 보도자료를 통해 “늦게나마 두 분의 화해가 이뤄진 것에 대해 벅찬 감격을 금할 수 없다”며 “진심으로 환영하다”고 말했다. 이어 민추협은 “우리는 그동안 두 분의 화해를 계기로 하는 지역감정 해소를 가장 중요한 사업 목표로 삼고 활동해왔다”며 “앞으로도 망국병인 동서갈등과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국민통합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역할을 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아울러 민추협은 “민추협 회원 모두의 마음을 모아 존경하는 김 전 대통령의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소망했다. 그리고 민추협 소속 김무성·김영진·이용희·이인제·이종혁 등 전·현직 의원과 김덕룡 공동이사장은 이날 오후 2시 30분께 김 전 대통령이 입원 중인 서울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하여 김 전 대통령의 쾌유를 기원했으며, 이에 한광옥·한화갑·김옥두 전 의원을 비롯하여 동교동계 좌장격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등은 “이번 일을 계기로 화해 문제가 해소됐다”며 YS에게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 갈등의 불씨를 화합의 계기로 전환 또한 김덕룡 특보는 “두 분이 인간적으로 화해했으니 정치적인 화해는 후배들의 몫”이란 말로 방문 배경을 설명하고,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화해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 특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2의 민주화운동이라 생각하고 만성적인 지역감정을 극복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희호 여사를 찾아 과거 민추협 활동 당시의 이야기를 하며 위로했다.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무성 의원은 “빨리 쾌차해 YS와 DJ 두 분이 손을 잡고 광주 5·18 국립묘지를 찾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고 밝혔다. 민추협은 군사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1984년에 YS와 DJ를 구심점으로 출범하여 이듬해 2.12 총선 승리와 군사독재 종식을 끌어내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으나, 87년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 실패 이후 보스인 양김(兩金) 씨를 쫓아 분열의 길을 걸었다. 이후 민추협은 창립기념식 등 1년에 한두 번 모이는 형식적인 모임으로 위상이 추락했으나, 지난해 7월부터는 현재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의 주도로 매달 한 차례씩 모임을 갖고 물밑에서 양김의 화해를 적극 추진해왔지만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YS가 이번에 87년 야권 분열 후 22년 간 계속된 DJ와의 구원(舊怨) 관계를 털어냄에 따라, 그 동안 두 사람의 화해를 통해 지역감정 해소에 나서려던 민추협의 국민통합 노력에 탄력이 붙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또한 미국 방문 중 DJ의 위독 소식을 듣고 조기귀국한 무소속 정동영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오셔서 화해를 했다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이다. 좀 더 일찍 이런 일이 이뤄졌다면 국민들을 위한 교과서가 됐을 것”이라고 만시지탄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두 분은 협력하고 경쟁하고 동지였고 라이벌이었다. 앙금도 있겠지만 (이런 화해가) 교과서가 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화해 분위기는 여야의 치열한 공방으로 포연이 가득했던 8월 12일, DJ가 입원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한나라당·민주당·동교동계·상도동계·친이계·친박계·친노세력 등의 구별 없이 많은 인사들이 찾아온 데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북한에 퍼주기를 하면서 여론을 호도했다”며 DJ에 날을 세웠던 이기택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이날 병실을 찾아 DJ에 대해 “대한민국 민주화의 대들보”라고 높이 평가했고, 이에 동교동계 한광옥 전 의원은 빗속에서 그를 배웅하며 예의를 갖추기도 했으며, 미디어법 문제로 대치 입장에 있던 민주당 박지원 정책위의장과 박계동 국회 사무처장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또한 그동안 DJ를 비난해온 한나라당 내에서도 화합 분위기가 연출됐다. 촛불집회 당시 ‘DJ 배후설’을 제기했던 공성진 최고위원은 이날 라디오에 출연해 “(DJ는) 5년 간 훌륭한 치적을 많이 남겼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따라서 DJ의 입원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한국 사회 갈등의 또 다른 불씨가 될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화합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DJ는 이명박 대통령을 “독재자”로 지칭하는 등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 현 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당초 야권 일각에서는 “DJ 건강 악화는 현 정부가 지난 10년의 성과를 평가절하한데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이 같은 갈등의 불씨를 화합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데 앞장선 사람은 다름 아닌 DJ의 영원한 라이벌인 YS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DJ로부터 ‘독재자’라는 극언을 들었던 이 대통령도 병실을 찾아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 등도 이날 병실을 찾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쾌유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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