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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고려인 민족의 품에 보듬자

남북통일 때 힘 보탤 연해주 고려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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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44호 편집팀⁄ 2009.11.17 10:53:16

고려인을 알고 있는가? ‘조선족’이라는 이름은 어느덧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고려인’은 아직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까레이스키’라고도 불리는 고려인은 러시아 연해주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한민족 동포를 일컫는다. 연해주의 수도는 블라디보스크이다. 필자는 그곳에 작년과 재작년 두 차례 다녀온 적이 있는데, 고려인들을 보며 눈물을 많이 흘린 기억이 난다. 숱한 고난의 역사를 짊어진 채 한민족의 뿌리를 지켜가고자 힘쓰고 있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잊혀져가는 고려인들. 언젠가는 그들을 다시 찾아가 그들에게 한민족의 사랑과 정을 나누어주고 싶다는 꿈을 나는 매일 꾸며 살아간다. 연해주에서 시작된 고려인 이민사 고려인들의 아픔과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블라디보스토크를 이해해야 한다. 연해주의 수도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얼지 않는 항구를 만들기 위해 건설된 군사 요충지로서, 러시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광활한 러시아 대륙을 잇는 최장의 철도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착역으로서, 경제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한민족의 인연은 꽤나 오래되었다. 1860년대 초, 조선의 정치 불안과 빈곤에 쫓긴 한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주변 지역에 모여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정학적 요충지인 이곳에 정착한 이방인의 역사가, 그것도 약소국 국민들의 역사가 순탄할 리 없었다. 이방인들을 적대시하는 러시아에서 고려인들은 억압과 탄압의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흔히 한민족 해외 이주민의 4대 재앙으로 불리는 네 개의 사건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사건이고, 두 번째가 관동 대지진, 세 번째가 연해주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마지막으로 네 번째가 90년대 초의 LA 흑인폭동이다. 고려인들은 이 가운데 두 사건이나 직접 겪은 당사자들이다. ‘신한촌 사건’은 러시아인들이 고려인들을 콜레라균 전염 주체로 매도하여 그들을 도시에서 추방하면서 시작된다. 도시에서 추방된 고려인들은 한반도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신한촌’을 건설하여 그곳을 독립운동 기지로 삼았는데, 윤봉길 의사를 제외하고는 ‘의사’라는 명칭이 붙은 사람 거의 모두가 연해주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제에 최후까지 항전한 독립투사들은 대부분 연해주에 그 뿌리를 두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본이 신한촌을 달가워했을 리 없다. 일본은 신한촌의 고려인들을 공격하여 학살과 방화를 저지르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한촌 사건이다. 수천 명의 고려인들이 학살 또는 체포되고, 교회와 가옥 등이 모조리 불에 타고 말았다. 또한 1937년 러일전쟁 때에는, 고려인들이 일본의 스파이가 될 것을 염려한 러시아인들에 의해 18만 명이 강제이주당하는 이른바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인들은 고려인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 먼저 지도자들 3000명을 마을 어귀에서 즉결 처단하기 시작했고, 화물차의 짐칸에 실어 40일에 걸쳐 18만 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이때 이동 중에 짐짝처럼 내던져져 사망한 고려인이 무려 1만5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죽은 이의 장례식도 달리는 기차에서 시신을 차 밖으로 던져버리는 게 고작이었다니, 삶의 터전을 떠나 짐짝처럼 화물차에 몸을 맡긴 채 낯선 곳으로 향해야 했던 조상들의 심정을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으랴! 게다가 고려인들이 도착한 중앙아시아 지역은 아무런 농업 기반도 없던 땅이어서, 첫해 흉년을 지날 때 다섯 살 이하의 어린이들 대부분이 사망했다고 한다. 강제이주 후에도 고려인에 대한 러시아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고려인들은 거주지 제한과 여행 자유 제한, 군 입대 제한 등의 차별과 억압을 이겨내야 했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한 문화말살정책도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한민족이 어떤 민족이던가! 그들은 낯선 땅에서 희망의 역사를 일구어냈다. 척박한 중앙아시아 땅에 한민족 특유의 근면과 끈기로 수로를 만들고 쇠똥을 뿌리며 늪과 황무지를 농토로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한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잇기 위해 참으로 많은 애를 썼다. 그 후 1990년대 들어 구소련이 붕괴되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한 한국인들은 고려인들의 도움을 받아 놀라운 한류 정착의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만약 60년 전에 중앙아시아에 미리 진출한 고려인들이 없었다면, 한국인들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70년 동안이나 외부 세계에 문을 굳게 닫았던 땅이 바로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소련연방이었기 때문이다. 연해주는 우리에게 여전히 기회의 땅 지금 고려인들은 또 다른 새 희망의 역사를 가꾸어가고 있다. 구소련이 무너진 후, 3만5000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다시 연해주로 모여들면서, 그곳에 한민족의 뿌리를 새로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연해주를 떠날 때에 조국이 그들을 돕지 못했다면, 이제 조국은 그들의 재이주와 연해주 정착의 새 역사를 도와야 하지 않을까. 필자가 생각하건대, 그들은 통일 후의 대한민국을 준비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연해주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인접해 있는데다, 러시아와 북한은 같은 공산권 국가로서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따라서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향후 북한 정권이 붕괴되거나 통일이 되어 북한인들이 대거 블라디보스토크로 유입될 때 완충과 흡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연해주에 가면 북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필자도 그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공항에 세워진 고려항공 비행기와 북한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북한 정권에 착취당하는 인민들이다. 과거에 북한은 부채를 갚기 위해 노동력을 대거 러시아로 송출하였는데, 연해주 정부는 세르게이 다르킨 연해주 지사의 2003년 평양 방문 이후에 북한 노동자의 인원을 해마다 증가시켜왔고, 때로는 북한 노동자들과 죄수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기도 했다. 쥐꼬리 만한 일당(연 200달러)과 구직·환전 과정의 착취에도 불구하고, 연해주가 북한보다는 좋은 근로조건과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하기 때문에 러시아 파견 노동자로 선발되려는 경쟁도 만만치가 않다고 한다(북한에서 인력을 선발할 때는 독특한 기준이 있는데, 탈북을 막기 위해 아내와 가족이 있는 사람을 우선 파견한다). 또한 연해주는 중요한 탈북 루트가 되기도 한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건너 러시아에서 노동력을 팔며 단속을 피해 자유를 꿈꾸는 것이다. 내가 본 고려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한국의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했지만, 조국의 관심 부족으로 이미 언어도 문화도 많이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애정만큼은 어느 누구에게서나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인의 젊은 후손들은 우리말을 배우기 위해, 우리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한국을 많이 찾아오고 있다. 내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젊은 학생들도 많이 한국에 들어와 있다. 하지만 조선족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대우를 생각해본다면, 조선족보다 더 낯선 동포인 고려인들에 대한 시선이 따뜻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연해주는 우리에게 아직 기회의 땅이고, 고려인들은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품은 동포들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민족이 오늘 누리고 있는 번영은 신한촌의 독립열사들 덕분이었으니,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할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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