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Ⅰ. 김성준의 초기작은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점철돼 있다. 비록 직설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1990년대 초반에 제작된 <반전반핵> 연작에는 이 작가가 사회와 문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함축돼 있어 당시 그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짐작케 해 준다. 분위기상으로는 묵직하게 느껴지나 경쾌한 필치로 그린 캐리커처 풍의 이 그림들에는 강고한 사회현실을 겨냥한 작가의 시선이 우회적 풍자의 방식으로 묘사돼 있다. 시대적 아이콘이랄 수 있는 로봇태권Ⅴ를 비롯하여 최루탄, 성조기, 구호용 밀가루 부대에 찍힌 ‘악수표’ 등등이 등장하는 화면은 그의 관심이 지향하는 지점을 말해주는 표지들이다. 그는 사실적인 기법이 아닌, 캐리커처 풍의 묘사를 통해 사회현실에 대해 정공법으로서가 아니라 우회적인 방식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그런 연유로 해서 그의 화면에는 그가 고안해 낸 다양한 장치들이 동원되기에 이른다. 그 장치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말끔하게 칠한 배경이다. 노랑색, 주황색, 빨강색, 보라색과 같은 명시도가 큰 단색의 배경에 등장인물이나 소품을 적절히 배치하는 기법은 마치 잘 짜인 그래픽이나 만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같은 작품들의 도상적 특징은 그것들이 한편으로는 ‘팝적’으로 읽히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작용하는 중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팝적’인 의미는 사실 일차적인 것은 아니다. 즉 ‘캐리커처화’한 인물이 지닌 도상적 상징성, 중심인물에 덧붙여진 사물들이 보여주는 상황성과 암시성, ‘팝적’인 기호들이 지닌 풍자성 그리고 단색의 배경이 강화시키는 시선의 집중성 등등이 화면의 주요 장치로 동원되면서 그림의 알레고리적 측면을 더욱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Ⅱ. 1980년대 중반부터 비롯된 김성준의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은 특유의 도상적 화풍을 낳으면서 1990년대 중반의 <반전반핵> 연작으로 수렴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말하는 도상적 화풍이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캐리커처 풍’의 인물상이나 우의적인 사물들의 묘사를 가리킨다. 당시 그가 바라본 세상이란 “똑똑히 보세요/저 산하가 서로 위에 있으려 다투는지/산새와 들짐승이 제 종족을 학살하는지/있는 그대로 보세요/이성이 빚는 잔혹한 광기와/진화가 낳은 죽음의 사슬을”이라고 읊은 글에도 나타나 있듯이, 상호 투쟁적 양상을 지닌 것이었다. 그것이 동족상잔의 전쟁이든,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투쟁이든 아니면 남녀 간의 성적 관계든 간에 그의 눈에는 모두 대립과 갈등의 양상으로 비쳐졌다. 이 대립항은 그의 그림에서 복잡한 상징들과 기호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이 <반전반핵> 연작에 나타난 도상적 특징의 한 양상이다. Ⅲ. <해원상생>에서 드러나듯이 김성준이 자신의 그림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대지’에 대한 외경과 믿음이다. 그는 <반전반핵> 연작에 나타난 도상의 대립적 구조를 통해 간간히 이에 대한 암시를 해 왔다. 그것은 가령 핵구름과 엉겅퀴, 폭탄과 민들레, 포탄과 태아 등 성격적으로 상반된 소재를 배치함으로써 대립항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메시지는 연꽃을 손에 든 팔이 땅속으로부터 불쑥 솟아오르는 장면에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거니와, ‘해원상생’을 통한 대립의 해소는 궁극적으로 인류가 나아가야할 방향임을 이 장면은 말해주고 있다. 그의 그림에는 유독 자궁속의 태아, 부둥켜안은 남녀의 모습, 붉은 땅, 꽃과 식물, 연꽃, 아이들이 빈번히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이 지닌 모성성과 평화에 대한 상징에 해당한다. <눈을 뜨다> 연작에 와서 김성준은 예의 캐리커처 풍의 단순한 인물상과 복잡한 대립적 구조를 허물고 화면을 일원화하기에 이른다. 대략 90년대 후반에 해당하는 이 무렵의 연작은 추상성이 강조되며 그림은 더욱 회화적이 돼 간다. 붓의 터치가 강조되고 자연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며 생명에 대한 외경감이 주제로 부상되기에 이른다. 즉 <반전반핵> 연작에 나타났던 강고한 현실비판적 시각이 ‘생명’이라고 하는 보다 폭넓은 주제에 용해되면서 마치 더듬이처럼 또 다른 회화적 지평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Ⅳ. 작업노트에 의하면 작가는 2004년에 인도 여행을 하게 되면서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트라우마(trauma), 즉 ‘치유되지 않는 정신적 상처’를 개인전의 표제로 쓰면서 김성준은 2006년 천안문화예술회관에서 가진 개인전 출품작들에 저간의 정신적 탐색의 결과물들을 쏟아냈다. 다시 특유의 캐리커처 풍의 상징과 기호의 체계로 돌아간 그는 그러나 초기의 세계와는 판이하게 변한 그림의 내용을 보여주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해학적인 성격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배면(背面)의 고통을 숨기고 있으며 본 모습을 가면 뒤에 감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김성준에게 있어서 가면이 암시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상처받은 인간이 품게 되는 보상심리거나 결핍에 대한 원망(願望) 혹은 외줄을 타는 뚱뚱한 인간의 모습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인생은 한바탕 흐드러진 연극과도 같은 것이다. 김성준은 인간의 두 얼굴, 즉 페르소나(persona)의 이면에 감추어진 고통의 지점을 정확히 희극으로 치환시켜 한바탕 흐르러진 소극(笑劇)을 자아낸다. 그의 그림들은 두 사람의 남녀가 뱉어내는 말들이 예리한 칼날로 바뀌어 이를 방어하는 권투 글러브를 낀 로봇태권Ⅴ의 우스꽝스러운 자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슴 찡한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인도 여행은 김성준에게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리면 더러운 것(abject)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김성준의 이 무렵 그림, 즉 <가면극장> 연작에서 마치 어릿광대를 보는 것처럼 너나없이 위장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게 되는 것도 전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구는 가슴을 콕 찌르는 풍자와 함께 해학의 정신을 낳았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한바탕 웃음 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울의 그림자, 즉 가슴 밑바닥을 저미는 페이소스가 담겨있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은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지를 순례하는 참배객들은 그 강물이 전혀 더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聖)이기도 하면서 속(俗)이기도 하고, 순(純)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오(汚)이기도 하다. 똥이나 오줌과 같은 불결한 것은 문명화 과정에서 억압돼 방기된 것. 그것의 근원, 즉 문명의 시원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일은 그래서 언제나 즐겁다. 김성준의 그림들은 이 여행의 길목에서 만난 성찰의 계기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