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윤식 초목재영락 변로맹영어근저(草木재零落 便露萌潁於根底) 초목의 잎이 시들어 떨어지면 곧 다시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시서수응한 종회양기어비회(時序雖凝寒 終回陽氣於飛灰) 계절은 비록 얼어붙는 겨울이라 해도 그 속에서 봄기운은 돌아오나니, 숙살지중 생생지의상위지주(肅殺之中 生生之意常爲之主) 이는 만물을 죽이는 가운데도 다시 자라나게 하는 뜻이 늘 자리잡고 있음이라, 즉시가이견천지지심(卽時可以見天地之心) 가히 그로써 천지 자연의 마음을 볼 수 있을지어다. 눌촌 거사가 낮고 묵직하면서도 울리는 목소리로 한시(漢詩) 한 수를 읊었다. “그대들은 모두 한자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고로, 유교의 뿌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거외다. 그런 만큼, 이렇게 귀한 시를 음미한 대가로, 그대들도 누가 나서서 화답해야 되지 않겠소?” 눌촌 거사의 뜻밖의 요청에 모두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술렁였다. 그때 한시에 조예가 있다고 알려진 양백승이 선뜻 나서더니, 화답의 시를 읊기 시작했다. 무풍월화류 불성조화 무정욕기호 불성심체(無風月花柳 不成造化 無情欲嗜好 不成心體) 무릇 바람과 달과 꽃과 수양버들이 없으면 천지의 조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욕망과 인정의 좋고 싫음이 없으면 마음의 본체도 이루어지지 않느니, 지이아전물 불이물역아 즉기욕 막비천기 (只以我轉物 不以物役我 則嗜欲 莫非天機) 다만 내가 주체가 되어 만물을 다룰 수 있어 결코 그 만물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면, 그 욕망과 인정의 좋고 싫음도 하늘의 기운 아님이 없으니, 진정 즉시리경의(塵情 卽是理境矣) 세속적인 삶의 정리도 곧 도의 경지가 되지 않겠는가. 어느새 석양의 낭떠러지는 백중 보름달빛의 황홀한 조명을 받는 시 낭송 무대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저절로 용기가 생겼는지, 아니면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인지, 이번에는 손무혁이 나서 숨은 솜씨를 내보인다. 세인 위영리전박 동왈 진세고해(世人 爲營利纏縛 動曰 塵世苦海) 세상 사람들이 부질없는 것들을 바라는 마음에 얽매여 걸핏하면 티끌 같은 세상에 고통의 바다라고 말하지만, 부지운백산청 천행석립 화영조소 곡답초구(不知雲白山靑 川行石立 花迎鳥笑 谷答樵謳) 이는 흰구름 피어나고 산은 푸르며 시냇물 흐르고 바위는 우뚝하며 꽃들이 새들의 웃음을 반기고 골짜기가 나무꾼의 노래에 화답함을 알지 못해 그러하니라. 세역부진 해역불고 피자진고기심이(世亦不塵 海亦不苦 彼自塵苦其心爾) 분명코 세상은 티끌도 고해도 아니매, 다만 저들 스스로 그 마음 탓에 티끌이고 고통이 되는 것이니라. 누구 할 것 없이 가슴 뭉클한 감동이 넘쳐 흐르는 한시 낭송이 끝나자, 한동안 박수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만추의 밝은 보름달이 신비로운 은빛 광휘를 온 산야에 흩뿌리고 있었다. 지구가 멸망하는 그날 우주와 인간 그리고 나는 과연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왜 생겨났는지, 끝없는 궁금증이 쏟아져 나왔지만, 여전히 답답하고 아리송할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모두들 본인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고, 그래서 별도리 없이 여느 사람처럼 살아보려 했었다. 그런데 연원을 알 길 없는 엄청난 환난이 느닷없이 몰아닥쳤다. 그렇게 맞닥뜨린 재앙은 사람으로서는 차마 견디기 힘든 지독한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살고 싶은 욕망에 꿋꿋이 참고 버티며 무던히도 애를 쓰고 발버둥 쳤지만, 끝내 깊은 상처와 좌절만 남고 말았던 것이다. 한데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하지 않던가. 전혀 예기치 않은 뜻밖의 인연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잠시 비켜선 직후, 세상에 대한 담론을 나누게 되면서 문득 가슴속에 뜨거운 전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에너지가 움트는 것이 삶의 본능적 욕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지나온 인생의 반추를 통해 다시금 어떤 기운이 솟아나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사람이 뭔가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한다는 것은 아직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표징(表徵)이 아니겠는가. “거사님, 이 우주만물에 과연 영원한 존재라는 게 있는 건지요?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끝은 어디인지’ 궁금하기 그지 없습니다.” “허허, 이 세상의 끝이라……. 정녕 그대들은 소승으로 하여금 신의 영역을 침범하라 부추기는구려. 이 세상의 영원한 존재에 대한 탐구는 철학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다고 치부되는 화두인데, 하물며 어찌 이 자리에서 그 속 시원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겠소이까? 다만 생명체들의 삶의 터전인 ‘지구’와 그 속에서 현재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인간’은 과연 언제까지 존속할 수 있을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오. 자 그럼, 그런 의미에서, 천체물리학에 조예가 깊은 우리 양백승 처사께서 먼저 ‘지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의견을 주었으면 좋겠소이다.” 눌촌 거사의 갑작스런 제안에 대해 양백승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마치 대학교수처럼 강론을 시작했다. “지구의 존속 문제는 태양계 행성으로서 존재하는 ‘단순 물질 덩어리’와 인간의 삶의 터전으로서 역할을 하는 ‘생명체 연못’ 등 두 가지로 구분하여 따져봐야 될 것 같습니다. 우선 태양계 행성으로서 지구의 ‘우주 존재적 지속 여부’는 당연히 태양의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태양은 수소를 원료로 끊임없이 핵융합 작용을 함으로써 엄청난 에너지와 빛을 내면서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별입니다. 때문에 수소 원료가 바닥나면 태양의 생명은 소멸하게 됩니다. 현재 과학계가 예측하기로는 앞으로 20억 년 정도는 더 가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때가 되면 태양의 인력이 사라지면서, 지구는 우주를 떠도는 방랑자가 되거나, 아니면 산산이 부서져 흙먼지로 우주공간에 흩날리게 되겠지요.” 차분하게 또박또박 설명하는 양백승의 강의에 모두들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큰스님을 시중하는 석곡 행자는 누렇게 바랜 노트를 무릎에 올려놓고 열심히 메모하며 경청하였다. “다음은 인간 생존의 필요충분조건인 생명체 연못으로서 지구가 얼마나 더 존속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참고로 진화론적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진화의 가장 늦은 단계에 나타난 고등동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등동물이라는 점이 변화무쌍한 지구 생태환경 변화에 더 잘 적응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지구 생태환경이 극도로 열악해졌을 때, 오히려 박테리아 같은 단세포동물이나 그 밖의 수많은 하등 생명체들이 인간보다 더 잘 적응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최근까지의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지구 생태환경의 미래’를 전망해볼 때, 생명체 연못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수 있는 여러 나쁜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인간이 멸종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지구 생태환경으로 치닫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