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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선]지금 다문화교육이 절실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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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70호 편집팀⁄ 2010.05.17 16:51:31

글·윤영상 (ysangyn@naver.com) 어제 한 형님과 함께 식사를 하며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꽤나 괜찮은 직장을 가지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분이지만, 돌이켜보건대, 자신은 초등학교 입학 이후로 아무런 꿈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꿈이 없고, 삶은 생존에 머무를 뿐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많은 사람들, 많은 우리의 자녀들이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누구나 ‘의사 선생님이 될 거야’ ‘변호사가 될 거야’라며 공통된 꿈에 부풀었지만, 학교에 입학하고, 같은 골을 향해 부단히 달려가는 경쟁자들 틈바구니에서 내가 이루기에 벅찬 꿈이었음을 느끼게 되면, 우리 아이들의 꿈은 산산히 부서지고 목표를 상실한 채 생존만을 위한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왜?”라고 질문하게 하자 우리 모두 우리의 자녀 교육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시기이다. ‘사당오락’이라 했다. 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 이어령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결국 서울대는 불면증 걸린 사람들 중에서 더 오래 참아낸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분명 현실적으로 서울대를 졸업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성공의 기준을 대체 어디에 두고 있는 건가? 나는 나의 자녀를 사회가 원하는 소모품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의 자녀를 나의 자녀답게 개성 있는 인격체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사회에서 다양성은 인정되지 않으며, 상대적 소수와 약자는 사회생태 메커니즘에서 철저히 소외되어왔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사회적 강자라면, 타인의 일까지 생각해보고 싶지는 않을 수도 있다. 나의 자녀 양육하기에도 바쁘니까.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나의 자녀에게 이득이 되는가는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지난주, 어느 강좌를 통해 이어령 교수님의 교육론을 들어보았다. 이 교수님이 진단하듯이, 혹은 우리 모두가 내심 공감하듯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창의성과 다양성의 교육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어령 교수님이나 여타 교육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예가 있다. 바로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Isidor Isaac Rabi)의 예이다. 아이작 라비는 원자시계의 개념을 최초로 발견한 물리학자로 1944년에 노벨상을 탔다. 우리가 지금 카 내비게이션을 이용해 편하게 길을 찾아다니는 혜택도 바로 이 학자 덕택이다. 그가 아무도 생각지 못한 핵의 자기공명 기술을 개발해냈을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느냐고 기자들이 그 비결을 물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물으셨지요. ‘얘야, 오늘 공부 시간에는 선생님에게 무슨 질문을 했니?’ 그것이 바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비결이지요.” 한국의 어머니들은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들에게 그렇게 질문하지 않는다. “얘야, 오늘 무엇을 들었니?” “오늘은 무얼 배웠니?”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니?” 등등 너무나 수동적이다. 그러나 아이작 라비의 어머니는 아이가 ‘왜?’라는 질문을 갖게끔 했고, 교과서에 없는 내용들을 스스로 연구하고 개척하게 했다. 때로는 ‘왜?’라는 질문이 학교에서 이탈한 아웃사이더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배움은 학교의 틀을 깨고 삶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다양성과 창의성은 그 가운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이 대안학교이다. 아이작과 에디슨의 어머니, 그리고 교육열 높기로 유명한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그렇게 교육시켰다. 이어령 교수님의 표현 중에 또 재미난 것이 있다. 선생님이 바보 같아야 똑똑한 아이들이 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유명한 족집게 강사 밑에서 훌륭한 인재가 나올 수는 없다. 세상이 요구하는 질문의 정답만 제시하기 때문에, 똑똑한 강사 밑의 아이들은 스스로 그 문제를 두고 탐구해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믿음직스럽지 못한 선생님 밑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아이의 창의성이 발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이야기들을 꺼낸 이유는 다문화교육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변모하고 있다. 현재 다문화 이주민은 주민등록 인구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이대로 이주민의 유입이 증가하면 2020년에는 도시 인구의 20%, 농촌 인구의 80%가 다문화가족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공동체 과잉의 상태이며, 동질성만을 고집한다. 혈연·학연·지연을 중시하며, 외부인을 두려워하고 경계한다. 유태인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땅이 없이 사방에 흩어져 살아왔다. 그 와중에서 그들은 민족의식을 중시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땅을 밟고 있는 사방의 문화를 통해 다양성과 창조성을 습득했다. 노벨상 수상자 300여 명 중 100여 명이 유태인일 정도로 유태인들은 머리가 좋은 민족으로 소문나 있는데, 그 비결은 널리 알려진 셰마 교육 외에, 다양성 속에서 살아야 했던 민족적 특성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우리 아이들이 다문화사회 속에서 살게 된 것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풍토 속에서 새로운 지식들을 재결합하여 나만의 지혜를 재창조해낼 수 있는 환경을 얻은 셈이니까. 이 세상에 ‘미운 오리 새끼’는 없다 오늘 강조하고 싶은 ‘다문화교육’이란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끼리 각자의 문화가 지닌 가치를 알고 그것을 존중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을 말한다. 이는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한 것이고, 따라서 다문화교육의 목적은 가장 먼저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 아는 일에서 출발하며, 이는 전인교육으로 이어진다. 이어령 교수님에 의하면, 지식과 지혜의 습득은 ‘관심단계’와 ‘관찰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계형성의 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다양성에 대한 관심과 관찰의 폭이 넓어질수록, 그리고 그 관계 역시 다양할수록, 우리 아이들의 지혜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 존중의 시각은 다문화 이주민뿐 아니라, 우리의 소외 계층, 특히 소외 아동들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사회의 각 구성원을 이해하고 함께 자라나는 것이 우리 자녀들에게는 경쟁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없거나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취약 계층 아이들의 경우, 그 교육의 책임이 사회에 있음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 세상에 미운 오리 새끼란 없으며, 모두가 아름다운 백조로 태어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참교육은 아이들 각자에게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과 본연의 아름다움과 개성을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의 경쟁력이 되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는 사회풍토를 조성하지 않을까. 숙명여대의 슬로건은 꽤나 유명하다.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이 바로 그것이다. ‘힘’, ‘power’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그리 녹녹치가 않다. 무척이나 세고 강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간 강함을 추구해왔고, 강함을 통해 약자를 지배하고 억누르려고만 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도가는 ‘능유제강(能柔制强)’이라는 교훈을 통해서, 그리고 노자는 입속의 단단한 치아보다 오래 가는 것은 혀라는 비유를 통해서,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지혜를 전해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부드러운 힘은 무엇인가? 그 본질을 찾자면, 그것은 사랑이고 관심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아파하는 마음이며, 눈물을 흘려주는 마음이며, 다양성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문화교육은 우리 아이의 부드러운 힘을 길러주는 교육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힘을 빌려 생존할 수 밖에 없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출생 자체부터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다양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이처럼 혼자 살아가기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인간이 먼저 배워야할 것은 ‘함께 살아가는 법’이며, 이것이 바로 근본적이고도 지혜로운 교육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너무 ‘내 것’에만 집중해왔었다. 나의 건강, 내 꿈, 내 직장, 내 재산, 우리 가족에만 너무 포커스를 맞춰왔다. 시대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고 다양해질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나’라는 마스크를 벗어 던지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마땅히 ‘나’가 존재하려면 ‘너’가 있어야 하고 ‘우리’가 존재하려면 ‘너희’가 있어야 한다. 나의 자녀를 ‘나’가 아닌 ‘우리’를 볼 줄 아는, 이 시대의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교육할 때, 우리 아이들은 유태인의 지혜를 넘어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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