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태 편집국장 고전 얘기를 좀 해보자. 서양 사람들이 최고로 치는 고전이 있다. 바로 서구 역사에서 최초의 문학작품이라는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다. 기원전 8세기에 쓰였다는 이 두 작품에 대해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모든 위대한 작품은 일리아스 아니면 오디세이아”라고 했다니, 얼마나 귀중하게 치는지 알 만하다. 서구의 모든 명작들은 이 두 작품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평가니 말이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소의 안재원 교수는 ‘오디세이아’의 주제를 ‘야만과 문명의 구분’이라고 규정했다. 문명의 여명기에 야만과 문명을 구분하는 내용이 이 난해한 작품의 핵심이라는 지적이다. 그리고 고대 희랍 사람들이 문명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바로 ‘열린 마음’이었다고 한다. 즉, 아는 사람은 물론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도 사람으로 대하느냐 아니냐가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난파한 끝에 벌거숭이 몸뚱이로 나타난 오디세우스에게 나우시카 공주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에 오셨으니 간청하는 옷과 모든 것을 받으실 거예요.” 반대로, 일 안 해도 식량이 저절로 자라는 지상낙원 ‘키클롭스들의 나라’에서는 그렇게 풍족한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마구 죽이고 잡아먹기까지 한다. 아무리 풍족한 사회라도 법·제도가 없고 열린 마음이 없으면 야만국이라는 게 작가의 판단이다. 이런 규정을 보면서 우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고대 희랍의 ‘문명 기준’에 따른다면, 한국은 야만국인가, 문명국인가? 우리에게 법과 제도는 있는가? 아니 만들어진 법과 제도는 잘 지켜지고 있는가? 아는 사람뿐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도 인간적인 대우를 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내 가족, 내 고향 사람, 학교 선후배 아니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야멸찬 사회인가?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항상 그렇듯 올해도 입후보자 중 많은 숫자가 전과자·세금체납자·병역미필자란다. 서구 문명국의 기준으로는 ‘표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대거 나서는 게 한국의 선거판이다. 한국 정치권·경제계·교육계에는 불법과 스캔들·횡령이 끊이지 않는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분노한다. 그러나 다음 선거에서는 그 분노의 대상들이 또 몰표를 받는다. 이런 게 문명국의 모습일까? 서구에 문명의 기준이 있다면,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에도 문명의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동아시아적 기준은 희미해진 상태다. 오히려 19세기 말부터 서양에서 동양으로 밀어닥친 ‘서구의 기준’은 식민주의적 자본주의의 특징이 듬뿍 들어간 형태였고, 그래서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인의 문명 기준에는 ‘문명=물질문명’이라는 특징이 강한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돈의 양을 문명의 척도로 치는 착각에 잘 빠진다. 한국이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니 문명의 척도에서도 세계 10위권으로 생각하는 착각이다. 그러나, 고대 희랍의 기준으로 돌아가 문명 여명기의 잣대로 우리를 다시 재본다면 어떨까. “너희는 문명인인가, 야만인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명쾌하고 자신감 있게 “한국은 문명국”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나? 그러기엔 켕기는 점이 많다. 그게 우리 문명의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