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82호 편집팀⁄ 2010.08.09 16:35:38
이상면 문화예술 편집위원 7월 29일 개봉한 영국 영화 <크랙>(Crack)은 1930년대 여학생 기숙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룬다. 그런데 영화 내용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감독이 흥미롭게도 유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딸인 조던 스콧이고, 아버지와 동생 토니 스콧이 제작을 맡았다는 점이다. 물론 딸은 아버지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글래디에이터>처럼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만들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를 보니 분명 그랬다. 조던 스콧은 배경을 시골 해안가의 기숙학교와 그 지역으로 한정해 제작비를 줄이며 드라마에 치중하는 연출을 하여, 사회 속에서 인간들 사이의 보편적 갈등을 표현하고자 했다. 영화는 고교 1, 2학년 정도의 여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하고 엄격한 규율이 있는 가톨릭 학교 내에서 전개된다. 이 학교는 사실 약간씩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 집안에서 부모가 학생들을 맡기는 곳이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어서 부모들이 안심하는 이 학교에 스페인의 귀족 출신 여학생이 전학을 오면서 학생들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생겨난다.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면 ‘이지메·왕따’ 같은 말들과 더불어 우리 학교와 사회에도 잘 알려져 있다. 사회의 전통과 제도, 학교의 규율이 첨가돼 개인을 억압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영화라면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에 나오는 폭력은 이런 게 아니다. 여기에 이 작은 영화의 묘미가 있다. 유난히 예쁘고 공부 잘하고 아는 것 많은 외국 여학생이 여교사로부터 사랑까지 받는데, 그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여학생들은 어쩔까. 즉, 평범하게 생기고 공부도 그저 그렇고 시야도 좁은 여학생들이, 예쁘장한 미모에 다이빙을 잘하고 여행을 통해 세상도 많이 알아서 선생님들의 귀염을 독차지하는 스페인 여학생을 왕따시키는 단순 구도가 아니다. 즉, 영국의 보통 여학생들(평범한 동질적 집단)이 자기들과 달리 진갈색의 머리칼과 눈썹·눈동자로 남유럽적인 용모를 지닌 스페인 여학생(뛰어난 이질적인 개인)을 못살게 구는 이분법적 갈등이 아니다. 여기에 여선생이 끼어들어 삼각관계가 성립된다. 비교적 강한 인상을 지닌 여배우 에바 그린이 맡은 30대 중반의 여선생은 다이빙을 가르치는데, 종종 열정적으로 시적인 언어들을 내뿜고 ‘피지컬’(physical)을 외치며 정신보다 마음의 자유와 신체 표현을 존중하는 개혁적인 타입으로 보인다. 여기서 다이빙은 신체 표현의 한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문제는 여선생이 스페인 여학생 피아나를 은근히 좋아하고, 파티 후 만취한 피아나를 ‘피지컬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아나가 동성연애자인 여선생을 좋아하지 않자, 실망하고 수치심을 느낀 여선생은 피아나에 대한 애정이 증오로 변한다. 이를 모르고, 그저 피아나에 대한 질투가 극에 달한 여학생들은 피아나를 숲속에서 몰매 준다. 이때 뒤따라온 여선생은 호흡에 곤란을 느낀 피아나를 살리지 않고, 죽게 내버려둔다. 자신과 감정 교류가 되지 않은 상대에게 잔혹하게 복수한다. 이 장면에서는 우리 사회집단의 한 비유(메타포)를 보는 것 같다. ― ‘피아나만 없으면 우리가 다 편해질텐데….’ 하지만, 이를 지켜보고 또 여선생의 진면목을 알게 된 여학생들은 여선생에게 등을 돌린다. 조던 스콧 감독은 극중 장면의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자연의 이미지 연출과 배우들의 인상, 심리 표현에서 뛰어난 점을 보여주긴 했지만, 전체 드라마는 파편적이다. 조단 스콧이 더 나은 영화적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춘다면, 아버지와는 다른 스타일의 훌륭한 감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