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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짱이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다

개미의 도움으로 베짱이가 그 겨울을 넘겼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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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181-182호 편집팀⁄ 2010.08.09 16:50:55

글·윤영상 (ysangyn@naver.com) 우리 주위에서 고난의 현장, 고난의 인생을 발견해내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 줄기 희망의 빛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연약한 손을 뻗어 캄캄한 동굴 속을 이리저리 더듬는 우리의 이웃들, 그리고 우리 자신. 과연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생각해보건대, 고난에 대한 보편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첫 번째 인식은 고난에 처한 사람은 곧 패배자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사회적 약자의 사회적 소외라는 안타까운 결과로 귀결되곤 한다. 고난은 분명 우리를 깊은 바닥에까지 내동댕이치는 듯하다. 필자 역시 최근에 가정의 일, 직장의 일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에까지 내몰리며 처절하게 하늘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난의 중심에서 내면과의 깊고도 긴 싸움을 끝마쳤을 때, 필자는 비로소 고난이 저주가 아닌 축복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게 해주며, 삶의 의미를 조망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강 혹은 시내가 흐를 때 바람이 고요하다면, 그 물이 완전히 썩을 때까지 물 밑의 더러운 쓰레기와 불순물이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심한 풍랑이 일어 그 물이 요동칠 때면, 물은 진흙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솟구쳐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난 속에서 우리의 깊은 내면을 발견하고 삶의 본질을 꿰뚫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필경 우리의 허물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새로운 힘의 원천이 된다. “고난 겪은 자가 인생의 행복을 안다” 예컨대, 우리는 질병을 통해서 내 안에 깊이 자리하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살림살이의 자랑거리들’을 발견하게 될 터이고, 결국엔 질병의 고통 끝에서 이러한 정욕의 덧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던 사람과의 가슴 아픈 사별을 통해서는, 내 차갑도록 메마르고 식어버린 사랑을 발견해내는 과정을 거쳐, 필경 내 가족의 소중함과 함께 잊혀졌던 옛 사랑의 기억과 관계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쓰라린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는, 지난날의 세속적인 인생관을 발견하고, 뒤틀렸던 인생의 방향성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고난을 축복이라고 하나보다. 어떤 책을 보니, 진정한 행복은 진지하다고 했다. 고난을 당한 사람은 그 고난을 이겨냈을 때, 과거에 경거망동하고 희희낙락하던 가벼운 기쁨에서 벗어나, 인생의 진지한 행복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최근 어느 휠체어 댄서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타고난 체격에 운동신경도 남달라서 어릴 때부터 한국 신기록을 갈아치우던 장래가 촉망되는 역도 선수였다. 그런데 어느날 밤 6층 베란다에서 추락했고, 그는 남은 인생을 휠체어 위에서 살게 됐다. 아마도 그의 삶은 절망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 속에 있던 그가 스포츠댄스에 매료되어 휠체어 댄스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지금은 스포츠댄스계의 유망주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의 춤에서 심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아름다운 몸짓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꿈 같은 희망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의 춤은 다른 이들의 그것보다 특별하다. 과연 그는 실패자였고 고난은 그에게 저주였을까? 고난에 대한 두 번째 부정적 인식은 고난이 과거의 잘못 때문에 얻어지는 징계와 같은 것이라는 인식이다. 인과응보라는 말처럼,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렇다고 모든 고난이 과거의 어떤 잘못의 결과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 속에는 맹인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있다. ‘예수께서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맹인에 대한 제자들의 시선이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느꼈을 뿐이다. 필자가 종종 늦은 새벽까지 노숙인 봉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를 타면, 기사 아저씨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왜 그 사람들을 도와줍니까? 도와줘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사지도 멀쩡한 사람이 일해서 돈 벌 생각을 해야지, 베짱이처럼 놀기만 좋아해서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고난은 더 큰 행복으로 가기 위한 과정 노숙인이 된 것이 마치 노숙인 자신이나 부모의 잘못인 양 생각할 수 있고, 비단 노숙인뿐 아니라 누군가의 슬픔이나 아픔들도 인과응보의 결과처럼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는 욥이라는 사내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통당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욥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재산과 건강마저 잃었을 때, 지혜롭다는 그의 세 친구들은 그가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게 된 것이라며 그의 죄목을 들춰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욥에게도, 그의 세 친구들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고난은 더 큰 복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이야기들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맹인이 맹인된 이유가 하늘이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기 위함이라 하였고, 욥의 이야기에서도 종국에는 욥은 귀로 듣기만 하던 그의 신을 직접 눈으로 경험하는 복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오늘 잠시 읽은 책에서 보았던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를 향한 선한 목적의 황홀한 끌림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맹인을 통해 신이 그의 삶에 하시는 일들을 드러내시려 한다는 것, 또는 욥이 신을 눈으로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 이 이야기들은 맹인이나 욥이나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도 개개인을 향한 선한 목적과 아름다운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어본 까닭은 고난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고난당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회의 소외계층들은 대개 특별한 고난 가운데 놓인 사람들이었고, 그러한 고난 때문에 그들은 정죄당하고 소외당하여 항상 외로웠다. 이제는 고난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고난 중의 삶에 대한 위와 같은 편견들은 그 삶에 내재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의 싹들을 가차없이 잘라내게 된다. 이제는 노숙인 출신의 기업인, 장애우 출신의 선생님, 고아 출신의 정치인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고, 특별한 고난의 경험을 가진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더 훌륭해졌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 우리 사회가 고난을 보듬고 품어줄 수 있는 보다 성숙한 사회가 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성공우선주의로 일관해왔다. 한강의 기적을 거쳐 마천루와 같은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동안, 우리는 ‘성공’ 아니면 ‘패배’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채 살아왔다. 그래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고난을 정죄하거나 고난당한 사람들을 외면하기도 했던 것이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베짱이의 고난을 인과응보로만 바라보는데 그치거나, 그를 패배자로만 낙인찍어 추운 겨울을 나지 못한 채 얼어 죽게 내버려두었다면, 그 사회는 매몰찬 일꾼은 얻었을지언정 훌륭한 음악가는 잃었을지도 모른다. 개미의 도움으로 베짱이가 살아남는다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결말을 내보자면, 추운 겨울이 지난 후에 인생을 달관한 베짱이가 자신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세계적인 시인, 혹은 팝 스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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