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만’이냐, ‘4100만’이냐. 이 숫자의 선택을 두고 방송통신위원회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890만은 현재 01X(011, 016,017,018,019) 번호 이용자, 4100만 명은 010 번호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다. 01X 번호 이용자들은 현재 3G 사용 금지 정책에 가로 막혀 최신 스마트폰 단말기를 전혀 이용할 수 없다. 오로지 일반 피처폰만 사용해야 한다. 그마저도 희귀해 구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 반면, 4100만 명은 2G와 3G망에서 010번호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010으로의 번호 통합을 예상하고 사용하던 2G폰에서 앞 번호만 바꾸거나 3G 단말기로 교체하기 위해 번호를 바꾼 이들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방통위 입장 2G망에서 01X를 이용하는 사용자들은 ‘010 강제 통합’에 반대하며 거세게 저항하고 있고, 010 통합에 따라 쓰던 번호를 바꾼 사용자들에게는 형평성 문제도 걸려 있어, 방통위로서는 결단을 내리기가 결코 쉬운 상황이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건 간에 양쪽 모두로부터 강한 반발을 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010 번호 통합 문제가 이렇게 진통을 겪고 있는 까닭은 정부가 이동통신 사업자에게 각각 다른 식별번호를 부여하면서 시작됐다. 정부는 SK텔레콤 011, KT(구 KTF) 016, 한솔텔레콤 018, LG유플러스(구 LG텔레콤) 019, 신세기통신(SK텔레콤과 합병) 017 등 각 회사별로 다른 앞자리 번호를 제공했다. 문제는 이렇게 번호가 나눠지면서 SK텔레콤의 시장 독과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이 회사는 황금 주파수로 불리는 800MHZ 주파수 특성을 011 번호의 특징으로 내세우며 경쟁 업체들보다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이에 타 경쟁업체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자, 정부는 2004년에 010 식별번호를 도입하게 된다. 이동전화 가입자 가운데 010 사용자가 전체 가입자의 80%를 넘으면 010으로 통합한다고 예고했다. 2010년 7월 말 현재 010 가입자의 비중은 전체 이동통신 가입자의 82%를 차지해 방통위가 통합 추진에 나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010 번호 통합을 추진하는 방통위의 상황은 녹록치 않다. 최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이용경(창조한국당) 의원이 기존 01X 가입자도 번호를 바꾸지 않고 3G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의 법률안을 발의했기 때문이다. 이 개정안에는 ▲정부가 이용자 의사에 반해 강제로 전기통신 서비스 식별번호를 변경 또는 회수하지 못하도록 하고 ▲샐룰러 및 PCS, 3G 서비스 가입자가 식별번호에 따른 번호 이동의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890만 명에 달하는 소비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010 통합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번호 통합을 적극 알리지 않아놓고, 통합 예고 조건이 충족되자 통합에 나선 것은 정당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반면, 통신업자들은 010으로의 번호 통합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시기에는 이견을 보이고 있다. 지난 7월에 이용경 창조한국당 국회의원실이 개최한 ‘010 번호 정책 전문가 간담회’에서 KT 공성환 상무는 “정부 정책의 신뢰성 제고, 소비자의 선택권 확대, 시장의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번호 통합 정책의 조속한 시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SK텔레콤 하성호 상무는 “정부의 번호 통합 정책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공감하나 여전히 2G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사회적 공감대에 맞춰 점진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통신사 사이에도 010 통합 문제를 놓고 속도조절론에 의견 차이가 나는 실정이어서,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 방통위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방통위 통신자원정책국 이준희 사무관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각 사업자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릴 수 있기 때문에 방통위에서도 다각적인 검토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각 통신사가 보유한 주파수에 따라 2G 서비스 제공 유무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내년에 2G 서비스 제공을 준비하는 KT의 경우, 보유하고 있는 2.1기가헤르츠(㎓) 주파수는 LTE(4세대 이동통신)에 사용될 예정인데, 2G 서비스와 동시에 제공할 수 없다. 800메가헤르츠(㎒) 주파수 대역을 보유한 SK텔레콤은 2G와 LTE 서비스를 모두 제공할 여력이 된다. 그런가하면, LG유플러스는 현재 3G망이 없기 때문에 LTE 서비스를 제공하기 전까지는 2G서비스를 중단할 수 없다. LTE 서비스가 보편적인 서비스로 자리 잡을 때까지는 2G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2G 이용자들의 010 번호 통합을 추진할 경우, 2G 서비스로 제공하는 통신 사업자로 사용자가 쏠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방통위가 섣불리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01X 이용자들 “번호는 나의 상징” 이 사무관은 “01X 이용자가 번호를 곧 ‘나의 상징’으로 여기는 심정에는 이해가 간다”면서도 “이동통신사 약관 정책이 변경되면 번호 회수를 할 수 있도록 나와 있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또 번호는 ‘국가자산’인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기통신사업법에 근거한 전기통신번호 관리 세칙에 번호는 공공자산임이 명시돼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법원 판례를 보더라도 이동통신 번호는 특정 개인이나 회사가 소유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와 있다. SK텔레콤이 번호 통합에 반대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번호도 공공자산임을 들어 SK텔레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방통위 측은 “개인의 이익도 고려해야 하지만, 01X 번호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010 이용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방통위에서는 010 통합 기조에는 변함이 없지만, 01X 사용자들이 890만 명에 달해서 여러 방안 등을 강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01X 번호를 찾을 길이 없을 때 홈페이지에서 번호를 찾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든지, 가입자의 동의를 받아 원격으로 010 전화번호를 바꿀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01X 번호를 010으로 당장 통합하는 데는 기존 이용자들의 반발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통합 결정이 나더라도 1년 정도의 홍보 기간을 둘 계획이다. 010 번호 통합 결정은 빠르면 9월 전에, 늦어도 올해 안에는 이뤄질 전망이다. “방통위, 이번에 확실하게 통합이든 아니든 결론 내려야” 010번호통합반대 서민기 대표 인터뷰
회원 수 6300여 명에 이르는 ‘010통합반대운동본부’ 서민기(32) 대표는 현재 두 개의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다. 01X 번호를 쓰는 2G 피처폰과 아이폰이 그것이다. 그동안 대외적인 활동을 할 때는 2G 단말기의 01X 번호를 알렸기 때문에, 그 번호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010통합반대운동본부의 요구는 01X 번호를 전면적으로 허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사용자들의 번호 이용권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01X 번호를 3G망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다음은 서 대표와의 1문 1답이다. -01X 번호를 없애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틀린 정책이다. 사람들은 “국가에서 하는 정책이 잘못 됐겠어?”라고 생각하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정부 정책이 잘못된 데서 빚어진 결과다. 정부는 과거 PCS 3사의 번호를 018로 통합하기 전에 먼저 사업자를 정해버렸다. 그때 정부는 사업자별로 번호를 준 당사자이면서, 지금 와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통신 사업자도 지금까지 앞자리 번호로 장사를 다 해놓고 정부 정책의 피해자인 양 말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 통합에는 반대를 안 하지만, 통합을 하되 기존 가입자는 해지하기 전까지는 쓰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방통위가 정책의 일관성을 주장하는데, 방통위야말로 제발 정책의 일관성을 가졌으면 좋겠다. -2G 01X 번호를 사용 할 때 불편한 점과 불이익은 무엇인가? 스마트폰을 못 쓴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스마트폰을 쓰고 싶어도 못 쓴다. 2G 스마트폰이 나올 예정이라고 하는데, 2G망은 음성통화 위주의 서비스이기 때문에 데이터 통신료가 비싸다. 데이터 트래픽도 감당하기 힘들다. 그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이다. 스마트폰 대신 어쩔 수 없이 2G 피처폰을 쓰게 되더라도 기계 값이 최하 40만원 대로 비싸다. 낮은 사양이여서 쓸 만한 기계가 없다. 게다가 010은 2G, 3G망에서 모두 번호를 사용한다. 01X 번호의 3G망 사용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데, 방통위가 막고 있다. 인종차별 정책과 뭐가 다른지 묻고 싶다. -왜 01X 번호를 고수하려고 하나? 휴대전화는 24시간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기기다. 10년 넘게 썼던 번호는 인적 네트워크의 징표이자 무형의 자산인데, 타의에 의해 번호를 변경하면 이 비용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한 번호를 오랫동안 써온 영업사원이나 프리랜서의 경우, 010 번호로 통합되면 생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 일반 사업자들은 명함이나 간판까지 바꿔야 함은 물론이고, 직장인들도 이메일 등 이용 중인 인터넷 사이트에서 개인정보 변경을 해야 한다. 하다못해 현금영수증 전화번호도 바꿔야 하는 불편을 겪게 된다. -010 통합을 알고 기존 번호를 010으로 바꾼 사람들도 많다. 현재 4000만 명이 010 번호를 사용한다. 형평성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휴대전화 가게에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해서 빚어진 일이다. 4000만 명 중 2200만 명이 신규 가입이고, 1800만 명이 01X에서 넘어갔다. 이들은 단말기 할인에 최신 기종 선택을 할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010 전환자들은 01X 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단말기 할인을 경제성으로 따져보고 선택한 것이다. -그래도 방통위 입장에서는 '890만 vs 4000만'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입장인데…. 번호로 장사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동통신 사업자에서 단말기 제조사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시대이다. 어떤 단말기를 들여오고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느냐로 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 통신사들은 이것으로 고민을 해야 하고, 번호를 가지고 왈가왈부해서도 안 된다. 방통위는 통신사의 입장을 고려하기보다 소비자들의 편의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최장 26년 써왔던 번호를 쓰던 사람도 있는데, 방통위는 쓰던 번호를 내놓으라고 해놓고도 안내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방통위 홈페이지에 어떤 설명도 없다. 정책의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정책을 소비자에게 똑바로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지 묻고 싶다. 방통위가 이번에 명확하게 결론을 내지 않고 땜질식 처방을 내린다면, LTE(4세대 이동통신망) 서비스 때도 같은 논란이 재연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통합이든 아니든 해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