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없이 많은 고정관념에 둘러싸여 세상을 살고 있다. 다수가 믿는 것, 다수가 인정하는 것, 다수가 하는 행동들을 우리는 ‘맞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고정관념에 의한 결과가 행복이라면 좋은 고정관념이다. 하지만 고정관념이 자신을 속박하고 행복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벗어나야 하는 고정관념이다. 새하얀 바탕에 깔끔한 동양화적 느낌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김남표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작품의 소재(내용)가 무엇인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생각 외였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아틀리에의 개인 작업실에서 만난 김남표 작가는 “요즘 작가들은 소재에 의존도가 높은데 그에 맞춰 움직이길 거부한다. 작품에 담긴 서사적인 내용보다 시각적으로 먼저 다가와야 한다. 시각적인 감상과 느낌에서 중요한 의미가 드러나야 하는데 너무 소재 중심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그동안 작품을 눈으로 먼저 감상하기에 앞서 묻는 말이 바로 소재였다. 작가나 감상자 모두 소재에 고민하고 소재를 먼저 묻는 것은 혹시 습관처럼 길들여진 획일화된 고정관념이 아닐까? 작가든 감상자든 이 같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며, 모두가 느끼지 못하는 새로움을 찾는 것, 소재보다 시각적인 결과물에 집중하면 좋은 발상이 나오고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생각지 못했던 대답에 작품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배운 셈이었다. 이렇게 그와의 재밌는 대화는 시작됐다. 시간을 거슬러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술로 관심받기 시작해 예중과 예고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김남표는 대학원 시절 진로에 대한 갈등이 많았다. 당시 주위에서 유학을 많이 갔지만, 그는 국내에 남아 있는 친구들과 작품 활동을 하기로 하면서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5년 동안 개개인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집단막’이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 성 게릴라 전시를 했던 계기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의 근간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을 좋아했어요. 무엇보다 미술을 함으로써 어떤 일에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집단막은 공동 작업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개인 프로젝트로 진행하게 됐고, 주로 캔버스 전체를 털로 덮은 작품을 만들었어요. 환상적이었지만 보존성이 문제였지요. 그러다 페인팅과 섞어보자는 생각에 이르러 지금의 작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최근 작품에 여러 가지 다양한 재료를 쓰는 작가가 많지만, 인조털을 이질감 없이 조화롭게 활용하는 김남표 작가는 ‘털 작가’로까지 불린다.
그는 “기존에는 털을 먼저 붙이면서 작품을 만들어갔지만, 이제는 순서가 없다. 털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털은 오브제라기보다 일종의 제어 장치로 작용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무엇인가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남겨지고, 그곳에 털이 들어간다. 시스템 안에 한 요소로 털이 들어가며, 지금은 털뿐만 아니라 여러 재료가 사용된다”고 말한다. 그는 작업하기에 앞서 생각하고 계획하지 않는다. 먼저 그려가면서 상상하며 완성해간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이어지며 작품이 나온다는 얘기다. 삶의 일상도 수십 번, 수백 번 바뀌는데, 지금 그리는 그림과 잠시 후 아니 다음날 그리는 그림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가 또 다른 결과를 만들고 이야기가 흘러가듯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자신이 가진 생각을 멀리하고 작업에 임할수록 작품에 더 진실되게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평면이지만 입체적으로도 보이는 김남표의 작품은 밝고 화사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차분함이 묻어난다. 현실에 바탕을 둔 비현실적인 면이 조화를 이루며 마치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초현실적 화면을 나타낸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형식을 가져올 뿐이다. 현실의 좋은 이미지는 이미 완벽해 더 상상이 안 되면서도 무언가를 수용할 여지가 없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구겨진 사진이 화분이 되고 나무가 자라고 얼룩말의 얼굴이 나타난다. 작업은 캔버스에 파스텔을 이용해 전부 손으로 그리며, 그 위에 인조털을 붙여 새로운 시각적 연출을 보인다. “얼룩말이 주요 소재가 아닌데, 코와 입 등 부분부터 그리다 보면 어느새 얼룩말이 됩니다. 이러한 작업 방법이 내게 맞고 재미있어 자연스럽게 얼룩말이 자주 등장해요. 또한 어울리지 않는 서로 다른 소재가 잘 맞물려 대치를 이루는데, 바탕이 흰색이기 때문에 더 조화롭지요. 작품에 담긴 내용보다 시각적인 요소를 중시하면 소재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새로운 것을 머릿속보다 작업에서 찾아야 경쟁력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갈 계획이라는 김남표는 “본능적이고 순간적인 작업을 드러내고 보여주고 싶다. 특히 만들어지는 과정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순간과 과정에 집중하는 사람이 좋은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관람자를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김남표의 작품은 8월 27일부터 9월 15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김남표-지용호 2인전’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