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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선]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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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188-189호 편집팀⁄ 2010.09.27 11:43:33

글·윤영상 (ysangyn@naver.com) 1976년 옥스퍼드 대학교수인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인 유전자'를 담기 위한 하나의 생존기계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펼쳤고, 이기적인 유전자와 기존의 적자생존에 대한 이론은 진화론에 커다란 논리적 근거를 제공해 왔다. 또한 최근에는 스티븐 호킹이 인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점점 더 상대방의 것을 약탈하고 지구의 자원을 점점 더 소모하고 있다며,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을 수 없듯이 인류가 지구에서 계속 불어나지 못하고, 인류는 200년 이내에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러한 진화론에 대립되는 것은 기독교의 창조론이다. 창조론에서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의 죄(창조의 질서를 깨뜨리고 자신만을 드높이려는 이기심을 포함한다)로 인해 자연계의 질서가 깨지고 변화가 일어나 인류는 더 이상 땅이 내는 열매들로부터 식량을 충족할 수 없게 됐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이기적 죄성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대립되는 두 이론이지만, 무섭게도 진화론이나 창조론이나 인류가 겪고 있는 현재의 상황들이 인간의 죄성(이기심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며, 이 이기심으로 인한 인류의 부정적 미래를 경고하고 있다. 최근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가 지은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인류의 이처럼 무서운 죄성에 대해 그 잔인성과 심각성을 고발하고 있다. 인류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금도 세계적으로 매년 3000만 명이 죽음과 마주하는 심각한 기아상태에 처해 있고, 8억 2800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다. 또한 1980년 이후로 영양실조와 저개발로 매년 평균 700만 명이 실명하고 있고, 이들의 대다수는 어린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는 맹인의 수가 5000만에 달하며, 안질환인 트라코마에 감염된 인구가 1억 4600만 명에 달한다. (이런 시력 손상의 80%는 비타민A를 지속적으로 복용시키기만 해도 개선할 수 있다.) 극심한 식량부족 상태…. 그러나 사실 지구가 오늘날 생산해내는 식량은 그들을 충분히 먹이고도 남는다. 다만 부의 편중 문제로 식량이 효과적으로 소비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1984년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당시의 농업생산량을 기준으로 지구는 120억 인분의 식량을 거뜬히 생산해냈지만, 60억 인구의 상당수가 굶주려야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2010년도 쌀 재고량은 14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지만,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북한이나 아프리카에서 굶고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제공되지 못한다. 이처럼 아이러니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부자 나라는 자연도태설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다고 장 지글러는 지적한다. 과잉인구로 인한 산소부족과 여타 지구의 문제들이 약자의 자연도태로 조절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연도태를 대놓고 주장하기에는 차마 우리의 입이 부끄럽겠지만, 현 인류의 상황을 촉진시킨 워싱턴 합의(미국과 국제금융자본이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를 개발도상국의 발전모델로 삼기로 한 합의)는 자연도태를 야기시킨다. 사유재산권 보호, 정부규제 축소, 무역자유화와 시장 개방 등 비단 거시경제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승자독식의 입시경쟁과 그 후로도 계속되는 무한경쟁이 워싱턴 합의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가난한 사람 도울 필요 없다’고 주장한 멜서스를 잔인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거리의 노숙자를 스쳐 지나가면서 얼마나 덜 잔인한가? 대학 시절, 경제학사 시간에 배웠던 멜서스의 어느 기독교 성직자의 이론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1798년의 논문에서 그는 세계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비해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에 빈곤계층에 대한 사회보조나 지원을 중단하고 자발적으로 산아제한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빈곤계층을 도태시키겠다는 발상이다. '그런 악마 같은 사람이 있다니!'라고 대학시절 난 생각했다. 장 지글러의 책을 읽으며 시내의 어느 다리 밑을 지나는데 대낮인데도 몇 시간을 다리 밑에 웅크린 채 죽은 듯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노숙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사회의 시스템으로부터도 자연스럽게 도태돼 가고 있었다. 웅크린 채 도태돼가는 그들을 지나치는 수많은 시민들 중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나에게 해코지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대로 그렇게 도태돼 가는 것이 사회적으로 유익이라고 은연 중 생각하게 된다. 게으름뱅이들, 일할 능력 없는 무능력자들은 밥 먹을 자격도 없으니까.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멜서스의 주장, 즉, '적자생존을 통한 인류 보존과 나의 안녕'이라는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에 대해 나 자신도 은연 중에 동조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 이기심의 현실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곡물을 수출하는 브라질이 금융과두제(금융 소수 지배제)로 인해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다는 현실과, 세계 곳곳의 극심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1/4이 부유한 나라의 소들의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지구가 인류가 소비할 곡물의 두 배 이상을 생산해낸다고 하더라도 투자자들의 덤핑과 사재기에 따라 시카고 곡물거래소 가격이 요동치게 되면, 구호단체들과 빈곤 국가들은 손을 쓸 수 없게 되는 현실이다. 최저 가격 지지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곡물들이 폐기처분되고, 수많은 소들이 도살되고 있는 현실. 기아를 무기로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적국에 경제봉쇄를 가하고 있는 현실과, 이로 인한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라는 현실. 다국적기업들의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이 파괴돼 환경난민이 발생하는 현실과, 약소국에서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한 혁명가가 나올 때마다 서구 열강들의 지원 아래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이 뒤집히고 과거로 회기했던 현실. 자급자족의 능력을 갖춘 나라들이 서구 열강을 위한 특산물(초콜릿과 차 등)의 생산에만 집중하면서 정작 자신들이 먹을 곡물은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현실 등이 바로 우리 이기심이 빚어낸 현실이다. 요즘 서점가에서 단연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마이클 샌델 교수(하버드)의 ‘정의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좌와 우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성적 소수의 문제, 줄기세포 문제, 대리모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등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치기준에 대한 혼돈을 겪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 저자는 정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진지한 질문을 던지며, 책의 1장에서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플로리다 지역에서 일어난 상인들의 폭리 문제를 인용한다. 개인들의 이익 극대화 의지에 따라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이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하므로 상인들을 비판할 수 없다는 입장과, 인도적인 차원에서 수재민들을 위해 이익을 포기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한다. 관점에 따라 옳고 그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 ‘정의는 무엇인가?’ 샌델 교수는 정의에 대해 다음의 기본 원칙(공동선)을 제시한다. 1) 희생과 봉사의 시민의식의 함양 2) 시장의 도덕적 한계 인식 3) 불평등에 맞서는 시민적 연대 4) 도덕이 개입된 정치다. ‘사회계약론’에서 장 자크 루소는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했다. 시장에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 현실의 시장은 민중의 공동선을 향한 집단적인 의지를 담은 규범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인구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 현실을 해결하는 지름길은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며 공동선을 키우고 도덕을 개입시키는 것뿐. 장 지글러는 책의 마지막에서 단 한 가지 방법에 희망을 거는데 그것은 바로 ‘정의’에 대한 인간의 본성이다. 장 지글러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앞서 언급했던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gene)의 문제를 극복할 희망으로써 이기적 밈(meme: 문화전달의 단위)을 제시한다. 인간은 비록 이기적 유전자를 가졌지만, 그래서 호킹 박사의 경고처럼 종말을 향해 가고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단순한 눈앞의 이익보다 오히려 장기적인 이기적 이익을 선택할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졌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공동선을 추구해나감으로써 이타주의를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인들 역시,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신의 형상이 인간에게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지는 않는다. 비록 훼손됐지만, 신과의 교제를 이어가기 위한 기본적인 접촉점과 실마리는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성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 도덕성의 절대적 한계를 믿기에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근본적인 해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진화론자든 창조론자든, 궁극적인 해결책은 서로 다를지 몰라도 지금 우리에게 당장 요구되는 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장 지글러가 지적하고 있는 이 문제들이 비단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에 의해서만 야기된 건 아니다. 그 범위를 좁혀 생각해보면 지금 나의 호주머니에 결식아동의 하루 식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보다는 영화 한 편을 더 보거나 시원한 맥주 한 병을 마시는 것이 내게 더 유익이라는 판단이 오늘도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왜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가? 장 지글러와 마이클 샌델이 지적한대로 시민의 각성과 연대의식이 아직 미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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