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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강홍구展 그 집 : 이름 없는 것들의 묘비명

원앤제이 갤러리 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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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90호 편집팀⁄ 2010.10.08 10:27:04

김상우 (미술평론가) 원래 강홍구의 작업에는 봉합선이 뚜렷했다. 이어붙인 흔적을 전혀 숨기지 않았고, 관객의 시선을 대놓고 희롱하기 일쑤였다. 봉합선이 주는 효과는 명확하다. 이것은 진짜가 아니란 것, 그러니 한 발 떨어져 보라는 것. 흥미로운 것은 그 역설적 효과다. ‘스트레이트’로 윽박지르지 않고, ‘커브’로 현혹하기 때문에 더욱 뚫어져라 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작업에 담긴 질료도 거기에 호응했다. 오쇠리와 은평구 뉴타운 등등 재개발 풍경이 을씨년스러운 곳들로서, 현실이 거칠게 잘려나간 폐허들이다. 화면 내부를 수직으로 가르곤 했던 봉합선이 그래서 칼자국 같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이번 ‘그 집’에 나오는 풍경도 다르진 않았다. 예의 그대로 재개발 지역에 허리를 낮춘 단층집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 강홍구는 칼 대신 붓을 잡는다. 그래서 흑백의 풍경을 자르는 대신에 색을 입혀 놓았다. 달라진 것은 그것밖에 없다. 그러나 이 때문에 모든 것이 일변한다. 본인은 초창기 채색사진과 다를 게 없다고 한 발 빼지만, 그 말을 곧이 믿기는 힘들다. 어느덧 사라진 그것들을 보낼 생각을 하니까 베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사라진 현실을 어루만진다. 그가 색칠을 하는 이유다. 물론 날카로운 봉합선은 여전하다.

그러나 색칠의 손길은 그마저 보듬어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고스란히 화면 안에 갈무리 한다. 이 같은 상황은 뭐랄까, 갈 곳이라고는 무덤밖에 없을 늙은 창부에게 마지막으로 곱게 화장을 시킨 것만 같아서 매우 처연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름 없는 것들이 이제야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은 사람도 보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없는 무명의 존재들이었지만, 여기서 강홍구가 나직이 불러준다, ‘그 집’이라고. 그렇게 기억의 계기를 마련해 놓고서, 사라진 것들을 위해서 묘비를 세운다. 강홍구가 꾸었던 악몽은, 근대의 한국이 자해했던 상처는,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두 눈 똑바로 뜨고, 눈이 멀어질 지라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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