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미술평론가) ‘out of sight’라는 전시 부제는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 너머의 것, 또는 세밀하게 다가가야 보이는 것에 대한 이 전시의 의도를 압축한다. 칠해졌거나 그려졌다기보다는 뿌려지거나 죽죽 흘러내리는 형상들은 무엇인가의 흔적이나 잔여물로 보인다. 그것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깝다. 중첩되는 색선들은 팔레트나 화면이 아닌, 눈에서 섞이게 되어 있다. 조형요소들은 정밀하게 조정되기보다는 날것들로 병치된다. [무제-일련번호]로 건조하게 매겨진 제목이 붙은 그림들은 대체로 중심에 밀도가 높고, 얇게 펼쳐진 상태가 여러 겹 겹쳐져서 관객이 찾아내야 할 미지의 형상을 드러낸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제시이다. 가끔 나타나는, 수평선이나 각진 형태의 흰 공백인 기하학적 선을 제외한다면 화면에서 명확한 형태를 발견하기 힘들다. 선적 요소는 건물이나 집 같은 모습인데, 그조차도 완결되지 않고 어떤 터전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수많은 층위와 중첩을 통해 화면은 원근감이 부여되지만, 전체 형상은 밑도 끝도 없는 공간 속에 둥 떠 있는 듯 뿌리가 없다. 아니, 형상 전체가 어디선가 통째로 뽑혀진 뿌리 같다. 뿌리 뽑힌 존재, 즉 이방인의 시점은 수년 동안의 영국 유학 생활에서 절감한 것이지만, 한국에 왔다고 해서 근본적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중심 줄기와 곁가지가 구별되는 전형적인 뿌리라기보다는 뿌리줄기처럼 느슨하면서도 다방향성으로 뻗어 있다. 견고하고 닫혀 있는 형식과는 거리가 멀어도 그의 그림은 강렬한 파토스에 물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지석의 작품은 바로크적이다. 그의 작품에는 안정된 원근법을 거부하는 시각의 폭발적인 힘이 존재한다. 여기에서는 세계를 재현하는 주체의 명료한 관점은 사라지고, 주객관적 실재의 불투명성이 전면에 나타난다.
미술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시각적인 현상에 민감한 화가들이 보이는 것에 대해 가지는 의혹들은 의미심장하다. 그 의혹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들이 작품의 독특한 부분을 이룬다는 사실도 역설적이다. ‘out of sight’ 전에서 상정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는 메를로 퐁티가 회화의 개혁을 이끌 수 있는 영구한 자원으로 간주한 무정형의 지각적 세계, 즉 ‘그 자신은 어떠한 표현양식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온갖 표현양식을 불러오고 요구해서 화가들과 더불어 새로운 표현 노력이 새로이 솟구치게 하는 세계’와 가깝다.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현실적인 것은 현실적이어서 일관되고 확실한 것일 뿐, 일관적이어서 현실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상상적인 것은 상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비일관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일 뿐, 비일관적이기 때문에 상상적인 것은 아니다. 현상 없이는 가상도 없고, 모든 가상은 현상의 보완물이다. 세계와 존재, 이 둘의 관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지석의 작품은 존재가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었다하는 다양한 표현들로 간주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