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조 (미술비평·호남대 겸임교수) 유태환은 매우 정열적인 예술가이다. 자기 작업에 대한 뚜렷한 확신과 믿음으로 개성 있는 작품세계를 열어왔다. 거침없는 열정으로 20여 회의 발표전을 밀어붙여 오늘까지 왔다. 최근 그는 남모르는 고행의 시간을 보냈다. 고단한 예술가의 발자국에 상당한 의미를 되찾아 보도록 한 시련의 터널을 지나온 것이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생로병사의 길섶에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들여다본 사색의 공간을 그는 만들어냈다. 이번에 유태환은 2년 만의 야심찬 작품 발표를 준비했다.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새롭게 변화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화면상에서 드러나는 즐거운 변화이다. 항상 변화를 추구하는 작업의 성과로 달라진 공간 구성을 선보이는 일은 작가나 관람자 모두에게 기대를 갖게 한다. 물론 여기에는 유태환의 사유의 깊이가 느껴지는 내면의 성찰 흔적도 스며들어 값진 성과로 드러난다. 유태환의 근작들은 그 대상과 소재, 기법, 그리고 생각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변화하려는 강렬한 에너지를 엿보게 한다. 그가 이번 화면에서 품어 안은 주요 테마는 길과 마을, 산이다. 이들은 유태환이 틈나면 찾아다녔던 현장이다. 스케치 여행을 즐기고 산에 오르며 작업의 구상과 표현의 감성을 살려온 그로서는 생활이나 다름없었던 것. 그런 일상이 근래처럼 소중하게 다가온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반년 동안 병상에 머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인식한 것이다. 유태환은 ‘길’에 대한 각별한 의미를 부각했다. 대부분의 근작에서 길의 흐름과 윤곽을 화면에 살려 조형적 구성을 도모하고 있다. 반면 주변의 풍경은 과감히 축약하고 단순화하여 비워내고 있다.
이번에 흥미를 더한 것은 기법의 진화이다. 밑색을 칠하고 그 위에 덧칠한 다음 다시 나이프로 긁어내는 독창적 방식으로 화면의 질감을 키웠다. 원목의 질감처럼 착시효과까지 자아낸다. 원색을 끌어들여 다소 화려한 색채감을 시도하기도 했던 유태환은 희로애락의 사연들을 추억 속에 묻어버리듯 다시 덧칠하여 밑색이 우러나도록 하고 있다. 동시에 수없이 반복되는 수직적 나이프 작업을 통하여 그가 지나온 길의 흔적을 빈 공간 속에 숨기고 있다. 결과로써 보다 과정으로서의 예술정신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다. 이는 곧 작가 스스로의 마음을 비우고 세상 잡사의 고민들을 버리는 수행자의 모습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유태환은 오래된 것, 손때 묻은 것을 즐겨 찾는 작가이다. 그의 이런 취향은 바로 작업의 결과로 우리들을 감동시킨다. 자신의 숨소리조차 작업의 일부라는 유태환의 작업 과정은 작가 스스로를 냉철하게 되짚어보며 고민하고 연구하는 노력을 엿보게 한다. 그의 이번 작품은 길 위에서 사색하며 비우고 집약시킨 사유의 미학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기회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