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실장 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가 올해부터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노후생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있다. 정부는 제2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2011~2015년)을 확정짓고 5년 동안 75조 8000억 원을 투입해 최우선 국정과제로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에 비해 노후준비는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다. 최근 발표된 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고령화 대비 글로벌 준비도 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소득적정성 지수는 조사대상 20개 국가 중 19위였다. 인도는 물론 폴란드와 러시아, 중국보다도 순위가 낮다. 한국 밑에는 멕시코뿐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은퇴 전선에는 짙은 먹구름이 끼여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가 시작되면서 강력한 빗줄기가 쏟아질 기세다. 아무리 가뭄에 단비라고 하지만, 메마른 땅에 퍼붓는 폭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빗물은 땅으로 스며들지 못한 채 지표면을 훑고 지나가면서 홍수만 일으킬 뿐이다. 버핏은 눈덩이 잘 굴려 거부 만들었다는데, 당신은 눈 덮인 긴 언덕 잘 고르셨는지? 연금이야말로 눈덩이 굴리기에 가장 좋은 언덕 이 빗물이 단비가 되기 위해서는 흙의 알갱이가 곱고 부드러워야 한다. 그래야만 흙이 씨앗을 포근하게 감싸고, 내리는 빗물도 깊이 빨아들여 아름다운 열매를 키워낼 수 있다. 강한 폭우가 퍼붓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흙의 알갱이를 곱고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 노후 준비에서 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연금에 가입하는 일이다. 현역 시절에 가입하는 연금은 한겨울에 유행할 인플루엔자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해주는 예방주사와 같다. 예방주사 같은 연금에는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이 있다. 우리는 이 세 연금을 묶어 3층 사회보장제도라 부른다. 노후소득의 안정성과 적정성을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좋아해 마지않는 부동산만으로는 노후에 소득의 안정성과 적정성을 장담할 수 없다. 부동산 가격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며, 필요할 때 당장 현금화하기도 힘들다. 담보대출을 받으면 된다고 큰소리치지 말자. 일정한 소득을 만들어내기 힘든 노후에 빚을 지는 것은 기름통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금이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예금 이자는 인플레이션도 못 따라잡는다. 가만히 앉아 내 돈을 도둑맞는 꼴이다. 이자가 거의 없어도 괜찮을 만큼 예금 액수가 많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죽기 훨씬 이전에 예금이라는 물통이 동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목말라 죽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연금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연금을 통해 노후소득의 안정성과 적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입기간을 길게 가져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연금 가입 기간을 길게 가져가는 지름길은 하루라도 먼저 가입하는 것이다. 가입 시기가 이를수록 적은 부담으로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 세계 최고 갑부 중 한 명인 워렌 버핏은 자신의 전기 ‘스노볼(눈덩이)’에서 많은 돈을 번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14세 때 신문배달을 하면서 작은 눈덩이를 처음 만들었고, 그 후 56년간 긴 언덕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굴러왔을 뿐이다. 삶도 눈덩이와 같다. 중요한 것은 잘 뭉쳐지는 습기 머금은 눈과 진짜 긴 언덕을 찾아내는 것이다.” 연금에 일찍 가입하는 결정은 버핏이 말하는 긴 언덕을 더욱 길게 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국민연금은 정말로 긴 언덕이다. 소득활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연금이라는 긴 언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계속 소득활동만 유지하면 그만이다. 이만큼 쉬운 긴 언덕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불만이 많다. 용돈연금이라느니, 나중에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등 이유도 여러 가지다. 그러나 이유를 자세히 뜯어보면 기우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물론 한국의 국민연금은 노후소득의 적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28년까지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40%까지 인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국민연금이 제공하는 혜택을 생각하면 가벼울 뿐이다. 무엇보다도 국민연금은 국가가 책임지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떼일 염려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국민들이 투표라는 날카로운 심판의 칼을 휘두를 것이다. 또한 국민연금은 연금액의 실질가치를 보장하는 매우 가치 있는 장치를 두고 있다. 즉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연금액이 늘어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입자가 사망할 때까지 물가상승률만큼 늘어나는 연금을 매달 꼬박꼬박 지급해 준다. 최근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는 국민연금의 이러한 장점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국민연금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부부가 함께 가입하는 것이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는 자연스레 함께 가입하게 되지만, 홑벌이 부부의 경우는 다르다. 홑벌이 부부의 대부분에서 전업주부는 아내의 몫이다. 일반적으로 남편이 아내보다 서너 살 더 많고, 여자가 남자보다 보통 6~7년 오래 산다는 통계를 생각하면 남편 사후에도 아내는 평균적으로 10년 정도 혼자 살아야 한다. 이 기간 동안 아내의 생활비를 생각해야 한다. 연금은 오래 굴리는 게 최고 요령인데 요즘 퇴직연금 가입하면서 퇴직금 정산하는 건 바보짓. 회사에서 권해도 하지 말고 전액 퇴직연금으로 전환해야. 물론 남편 사후에도 아내에겐 유족연금이 나온다. 하지만 그 액수는 반으로 줄어든다. 이 금액으로는 아내가 살아가기에 그야말로 태부족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전업주부인 아내의 국민연금 가입이 중요하다. 부부가 함께 국민연금에 가입하는 것은 연금이라는 언덕의 길이를 두 배로 늘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연금 가입기간을 늘리는 것에는 연금 수령 시기를 뒤로 늦추는 방법도 있다. 최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민연금 수령 시기를 1년 늦출 때마다 7.2% 더 많은 연금액을 평생 동안 준다고 한다. 국민연금의 재정 부담이 걱정되긴 하지만 가입자 입장에선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사적연금에서도 얼마든지 가입 기간을 늘릴 수 있다. 먼저 근로기간 중에 발생한 퇴직금을 재원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퇴직연금을 보자. 요즘 퇴직연금 시장에서는 희한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퇴직연금 도입을 계기로 그동안 쌓아 놓았던 퇴직금을 찾아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퇴직금 중간정산의 만연이다. 이는 퇴직연금 가입기간을 스스로 까먹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바로 버핏이 말한 긴 언덕을 마다하고 스스로 짧은 언덕에 편승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배포는 놀랍지만 제도 도입의 취지와 정면으로 역행한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비록 회사에서 퇴직금 중간정산을 권유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동안 쌓아놓았던 퇴직금 전부를 퇴직연금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남은 근로기간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퇴직연금 가입기간을 늘릴 수 있다. 한편 퇴직연금처럼 가입기간을 과거로 소급할 수 없는 개인연금에서 긴 언덕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찍 가입해야 한다. 이것이 어렵다면 매달 불입하는 금액을 높임으로써 짧은 가입 기간을 만회할 수 있다. 현역시절에 연금 납입을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노후에 연금생활자로서 제2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