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환 (쿤스트독 갤러리 관장) 권정호의 새로운 시도인 ‘미래를 통하는 문’은 집적시켜 쌓아올린 해골 기둥들을 기념비로 혹은 묵시적 분묘를 자처하는 현대인의 보편적 삶을 조형적으로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주도적인 매개체로 사용된 해골들은 현존하는 실재이자 개념적 실체가 불명확한 부분적 부재를 드러내는 기표이기도 하다.(중략) 권정호는 2000개의 두개골 모형 위로 풀 먹인 상태의 젖은 닥을 도포해 형상을 만든다. 마르기를 기다려 모형에서 굳은 닥의 형태만 걷어내는 방식인데, 그 결과는 원본에서 사본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본의 근처에서 맴돌던 원본을 채집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권정호가 선택한 닥의 고유한 텍스츄어, 색감 등에서 연유한 바 있다. 또한 권정호는 의도적으로 최소한의 형태만 확인될 정도로 오브제를 성기게 만든다. 이는 확정적인 형태가 보다 수구적이라는 조형 원리를 비켜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물질성을 약화시켜 형식의 이면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다. 결과는 매우 효율적이다. 내부와 밖이 뚫린 해골의 형태는 주변의 조명, 사물, 공간 등에 반응해 시시각각 그 면모가 바뀐다. 각각의 해골들은 아크릴로 제작된 케이스에 3열, 4횡의 군집배열로 쌓여지는데 전열과 후열들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그 이미지가 뒤섞이는 듯한 착시가 생긴다. 따라서 바라보는 상태에 따라 각각의 형상들이 이동하고 합쳐지며 또 다른 층위의 일루전을 만들어 낸다. 이 일루전의 파동은 매우 감각적이며 유동적이다. 관념적인 논리가 섞여들 여지없이 그 자체로 중층적인 조형구조가 성립한다. 권정호는 이 3열 4횡 5단의 아크릴 케이스에 총 60개의 오브제가 배열되고 그것이 하나의 집적 단위가 되는 대규모 설치를 구상한다. 권정호의 구상은 죽음과 연관된 모든 기원을 아우르며 그 접점에서 상반된 가치들의 이항대립을 불식시키고 독립적인 죽음의 제단을 마련하는 것이 된다.(중략)
“나는 개인적인 작품을 만들지만 형식주의자는 아니다. 정신 속에 형식을 만들고 형식 속에 정신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지배하는 사고요, 나의 신앙이고 나의 확신이다.” 이 말은 권정호의 고백이자 그의 사상, 소양을 함축한다. 기술된 것처럼 그의 미학적 유연성은 그가 지금까지 거쳐 왔던 다양한 조형실험에서 파악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줄곧 견지해 온 원칙 중 하나는 삶의 존재론적 방식에 대한 의문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삶은 객관적 지점을 확보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실체는 반영의 피드백을 통해 추론될 뿐이다. 또한 그렇게 추론된 실체도 죽음이라는 허구적 반영의 거울에 투사된 것이라면 그 증명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삶도 죽음도 모두 비켜나 있는 상태의 지점이 필요하다. 권정호는 자신의 오브제를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소통의 이미지라고 상정하며 “삶과 죽음의 순환과 그 축적의 토대 위에서 세계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라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