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데스크 칼럼]안 때려서 학생들이 대든다고요?

  •  

cnbnews 202-203호 최영태⁄ 2010.12.27 15:02:45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사에게 대들고, 교사를 희롱하며, 폭행까지 하는 현실에 대해 ‘체벌 금지 탓’이라는 한심한 결론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게 어찌 그렇게 연결되는지, 참 이상한 논리다. 필자는 한국에서 초교 4학년까지 다니던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살러 갔었다. 필자의 아들은 소위 말하는 개구쟁이의 전형이었다. 항상 명랑-쾌활-유쾌한 아이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불만에 찬 호소가 가끔 들려 왔다. 축구부 활동을 하면서 코치 선생님이 벌을 세우고 때리기도 한다는 안타까운 얘기도 들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갔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말썽꾸러기를 미국 학교에 넣자니 걱정이 앞섰다. 아니나 다를까, 새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학교에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부부가 잔뜩 긴장한 채 학교에 갔다. 그러나 외국에서 갓 미국에 온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ESL 선생님이 부른 건, 혼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업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ABCD도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 학교를 들어갔으니 의사소통이 잘 될 리 없었다. 그 틈을 초로의 여선생님들은 포옹으로 메우고 있었다. “너무 귀엽다”고 안아 주기부터 하니 영어 못한다고 주눅들 리가 없었다. 워낙 말썽꾸러기 아들이다 보니 그 뒤에도 학교에 여러 차례 불려갔다. 선생님에게 부모가 혼나기도 했고 칭찬도 받았다. 그곳에도 학생들을 미워하기부터 하는 선생님도 극히 일부 있었지만 대개 교사들에게서 받은 건 ‘사랑하는 선생님’의 느낌이었다. 말썽꾸러기 작은 아들과는 달리 모범생인 첫째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게 됐을 때 미술 담당 교사가 “얘는 미국 최고의 사립 미대에 가야 하는데, 부모 형편이 그렇질 못하니 너무 아쉽다”며 자신이 나서서 장학금을 알아봐 주고, 장학금을 따기 위해 이런 저런 콘테스트에 아들과 함께 참가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며 미국 교사들의 학생 사랑을 또 한 번 가슴 절절하게 느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학교엔 체벌이 일체 없다. 때리지 않으니 학교가 개판일까? 그렇지 않다. 필자가 살아본 동네도 흑인 인구가 꽤 있는 약간 가난한 동네부터, 멕시칸 학생 비율이 높은 지역, 백인 중산층이 사는 속칭 ‘미국의 8학군’까지 다양했지만, 빈부 차이와 학교 분위기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체벌이 없으면 학생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힌 한국인 입장에서는 신기해 보일 정도로, 미국 학교에선 매 한 대 없이, 얼차려 한 번 없이 교육을 잘 시킨다. 그 비결은 시스템이다. 학칙 등 규칙을 정확히 정해 놓고 그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한다. 그러니 매를 안 들어도 학생이나 학부모는 학교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다. 요체는 시스템인데, 한국에선 이런 시스템을 배울 생각은 않고, 체벌이라는 쉬운 해결책만 찾으려 든다. 시스템을 고치는 건 어렵고, 비난의 대상을 찾는 건 쉽다. 그러나 시스템을 고쳐야 개선되지, ‘어느 놈이 잘못했다’고 욕을 퍼부어 봐야 남는 건 그냥 그대로의 시스템뿐이다. 한국에선 유치원 때부터 경쟁하라고 가르친다. 경쟁에서 뒤지면 인생이 끝난다고 가르치니 친구도 선생님도 모두 적이 되기 쉽다. 한국의 초-중-고-대학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절망의 한숨은 무섭기만 하다. 사회가 무너질 때 마지막으로 무너지는 게 교육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고도성장과 민주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높은 교육열과 지식인이었다. 교육을 통해 성장한 이 나라의 교육이 붕괴될 양상에 처했는데, 그 해결책을 단지 회초리에서 찾는다는 건 정말 무책임한 결론 아닌가?

배너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