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미술평론가) 김영주가 애용하는 모티브는 사슴이다. 사슴은 고대신화 속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성한 존재로 등장한다. 아마 인류가 태어난 시절부터 사슴이 있었기에 그런 신화가 탄생했고, 인간과 사슴의 관계가 싹트지 않았나 싶다. 작가에게 사슴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원형적 심상으로 잠재돼 있다. 사슴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해 그것이 내포한 의미를 일깨워주려고 하는 것 같다. 사슴과 함께 그의 작품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꼭 모종의 기호가 들어간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의 무의식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이런 기호는 단순히 장식적 요소로 기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의 경우는 의식의 기표로 이해된다. 작가는 암호 같은 이미지를 넣어 그의 그림이 존재의 뿌리와 맞닿아 있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니 얼마 전에 한 방송국에서 방영한 툰드라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빙하의 동토를 종횡무진 누비는 야생의 순록도 있지만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순록 목축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만일 순록이 없다면 그들의 삶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며, 그런 맥락에서 자연과의 공존을 키워드로 삼는 원주민들의 생활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툰드라 원주민 못지않게 자연과의 동행은 예술의 오래된 화두가 돼왔다. 김영주의 그림은 지구촌의 생태문제를 다룬다. 그의 작품에 외롭게 등장하는 사슴이나 죽어가는 사슴은 바로 이러한 심각한 환경문제를 지적한 것일 수 있다. 또한 그림의 배경으로 설정된 초목이나 잎사귀, 그리고 설경 등은 단순한 풍경으로 그려진 것이라기보다는 생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한편 사슴의 이미지는 고독과 애수를 띤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티 없이 맑고 거짓 없는 가녀린 존재를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성경에 언급된 희생양의 이미지와 유사한데 성경에서 희생양은 ‘죄 없는’ 그리스도가 ‘죄 많은’ 인류를 위해 자기목숨을 버린 것을 일컫는다. 대속(代贖)의 상징물으로서의 순결한 양의 이미지가 김영주에게 있어선 연약한 사슴의 이미지로 바뀌어 등장하고 있지 않나 짐작된다. 물론 작가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이타심을 발휘해 자기를 희생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림 안에 실어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사랑의 최고상(最高像)’을 담고 있다. 사슴은 고기와 뿔, 모피, 심지어 선혈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고마운 동물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신을 ‘내어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작가가 사슴을 애상스럽고 아름답게 묘출한 것은 숭고한 내어줌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눈 덮힌 관목사이를 서성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슴의 잔영이 기억에 선연히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