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옥 차의과학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교수, 전 국회의원 형제애에 대한 고찰을 오늘로 마무리한다. 정치철학에서부터 우리 다시 삶속의 형제애로 돌아와 본다. 형제간의 사랑은 살아 있는 현실이다. 점점 더 이기적인 핵가족 사회가 도래하고 저출산 현상의 심화로 형제자매의 삶을 생활에서 맛볼 수 없는 이 세대에 형제애를 말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이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그러나 형제간의 사랑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명제가 얼마나 절실한 사랑인지를 현실 속에서 말한다. 잠시 유전자로 연결된 피의 관계인 친 형제자매를 머리에 떠올려 보자.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가? 사무치게 보고 싶은가? 아니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도 않은가? 사랑의 감정, 미운 감정, 경쟁의 생각, 도움을 주었던 따뜻한 순간, 때리며 싸우던 순간 등등…. 분명한 것은 형제자매는 남과는 다른 끈끈한 감정이 연결되어 있는 원초적 관계라는 점이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이자 인위적으로 끊을 수 없는 관계…. 그렇다면 가장 현명한 선택은 보듬고 사랑하고 서로 돌보며 사는 것이다. 이 끊을 수 없는 관계를 타인으로 확장시킨 당사자가 죽음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한 예수의 형제애다. 형제애 원칙의 기원은 종교적 차원에서 기인한다. 프랑스 혁명의 철학적 기초가 되고 세계인권선언의 기초인 이 형제애의 깊은 뿌리는 종교에 있다. 많은 종교나 신화에 형제간의 이야기가 있다. 그중 서구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경의 이야기는 정치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대인의 기원에서 나타나는 카인과 아벨의 형제애는 지지할 수 없는 형제애다. 형제 중 한 명이 다른 한 형제를 죽인다. 유대인의 전통에서는 이 관계가 정치의 기원이 된다. 유대 사상에서 형제애의 이념과 정치의 탄생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의 증언인 신약 성경에서부터 다른 패러다임이 시작된다. 예수를 통해 인류는 예수의 형제로 구원을 받는다.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카인과 아벨의 형제애가 자신을 버리는, 넘치는 사랑에 근거한 형제애로 부활한다. 예수가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 그는 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인간으로서, 인간 중 한 명으로, 인간 모두를 그와 함께 데려갔으며,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안에서 예수의 형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근대 정치 이후의 형제애는 이렇듯 십자가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 후 앞선 글들에 언급한대로 사회 정치에 영향을 미치며 발달해 왔다. 예수를 정치인의 이상적인 모델로 보는 학자와 시각들이 많다. 이는 정치인이 자신의 생의 최후까지 지속적으로 자신을 완전히 소모시키면서 십자가(고통)로 향하는 근본적인 철학과 신념, 이념을 선언하며 살기 때문이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모두 “아하, 그래!”를 되뇌일 수 있다. 정치가 아닌 순간이나 영역은 없다고…. 또, 진정한 정치인이 어떤 덕목을 가져야 하는지까지도…. 이제 형제애에 대해 간단히 마무리를 해야겠다. 이태리의 정치학자 안토니오 바죠는 정치적 개념으로서 형제애의 기본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형제애는 관계의 패러다임이다. 정치에 있어서 관계란 모든 것을 의미한다. 정치는 특정한 관계다. 2. 형제애는 우리가 실행해야 할 이론의 실천적 본질이다. 우리 개개인이 형제애를 실천하며 살아야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정치가 가능하다. 가정의 형제애가 확대돼 정치적 행동으로 돼야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정치가 가능하다. 3. 형제애는 사고의 모델이기도 하다. 형제애는 주-종 관계, 남-녀 관계, 친구-적 관계 등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사상을 특정지어 온 2분법의 논리를 뛰어 넘는 총체적인 생각이다. 결국 마틴 루터 킹이 지적한 대로 형제애에 대한 깨달음이 현대 인식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형제애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은 대부분 제한적이고 변형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이제 진정한 형제애로 점철된 사랑의 정치를 실천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실천 양식은 나중에 하나씩 구체적으로 논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