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의 반역 - 크리에이터 혹은 이단아 1958년생인 키스헤링(Keith Haring), 그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팝 아티스트이다. 1934년생인 릴랑가, 그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팝 아티스트이다. 당뇨 합병증으로 두 다리를 잘라내면서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은 릴랑가, 에이즈로 죽어가면서도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은 키스헤링, 그 둘은 시대의 흐름에는 매서운 마음을 지닌 진보주의자였지만, 예술이 인간과 세계를 선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생각 멈추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멋진 크리에이터였다. 릴랑가는 1977년 뉴욕의 메리놀 대학과 1978년 워싱턴의 IMF 홀(World Bank)에서 전시를 가졌다. 당시 뉴욕에 있었던 키스헤링이 두 전시를 직접 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릴랑가의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형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릴랑가가 아프리카의 신화와 이데아를 동화적 심성으로 풀어낸 것처럼, 키스헤링은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는 마음으로 평화의 세계를 표현했다. 그리고 릴랑가가 자신의 그림을 캔버스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합판이나 가죽 등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들에 화폭을 드러낸 것처럼, 키스헤링은 종이는 물론 방수포나 거리의 벽 등 일상의 공간에 화폭을 옮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릴랑가는 예술과 낙서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예술의 중심에 인간을 세운 키스헤링과 닮은꼴이다. 예술을 대중 가까이로 끌어들인 릴랑가와 키스헤링, 그들은 서로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던 시대의 이단아였다. 인간을 향한 행렬 - 휴머니스트 혹은 소피스트 릴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신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큰 귀를 가진 이 신은 쉐타니라고 불리는데 근엄하기보다는 어린아이처럼 익살스럽고 귀엽게 생겼다. 릴랑가의 쉐타니는 사람들을 하나의 세계로 묶어내면서 인간의 삶과 의식을 평화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것은 마치 키스헤링이 ‘아기’라는 주제를 통해 평화를 이야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기를 자신의 로고로 사용한 키스헤링, 쉐타니를 인간의 존재의미와 관련시킨 릴랑가, 그 둘은 인간을 이해하는데 앞장을 선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사실 릴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어떤 사조에 속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왜 그런 그림을 그리는지 이해하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핸드폰, 전자악기, 병원 등과 같은 ‘현대’라는 테마는 키스헤링이 말하는 문맹퇴치, 즉 삶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의식이다. 다양한 피부색의 공존은 인종차별을 반대했던 키스헤링 논리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릴랑가와 키스헤링, 그들의 생각은 그림만큼이나 닮았다. 예술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 인간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마법에 걸려 릴랑가는 아프리카뿐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40회의 전시회를 가졌다. 예술은 특정한 몇몇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며 키스헤링은 세계 곳곳의 학교나 공장, 병원의 벽에 그림을 그렸다. 솔직하고 스스럼없이 그림을 그리고, 대중과의 소통에 생각의 끝을 멈추지 않은 그들은 분명 같은 궤도에 서 있었던 현대의 소피스트였는지도 모른다. 하모니를 위하여 - 낙관주의자 혹은 혁명가 공동체를 향한 릴랑가의 이데아는 생명의 나무라고 불리는 우자마에서 비롯됐다. 인간과 동식물이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즉 ‘우리’와도 같은 말이 우자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릴랑가는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둘이 아닌 하나로 받아들이는데서 삶에의 원동력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는 키스헤링이 의식과 무의식, 삶과 죽음의 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을 생명의 에너지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상통하는 말이다. 그런 힘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은 두 사람,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의 집합을 굳게 믿었던 지독한 낙관주의자였다.
릴랑가의 그림에는 항상 ‘함께’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함께 춤을 추고, 함께 음식을 먹고, 함께 병원에 간다. 녹록치 못한 현실에서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행복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키스헤링이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키스헤링의 작업이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예술이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만나는 소통의 공간, 즐거움의 마당이 되기 때문이다. 릴랑가와 키스헤링이 간결한 선과 선명한 색상으로 일상의 주제를 율동적으로 풀어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다양함을 팝아트적인 형식으로 표현하면서 회화의 영역을 넓혀나간 릴랑가와 키스헤링, 그들은 행동주의적 예술가의 길을 걸은 혁명가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료=아프리카미술관 제공) -탄자니아의 릴랑가(1934~2005)는 서구미술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아프리카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전통에 집착하지 않는, 즉 마콘데족의 조각과 팅가팅가의 그림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은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아프리카 현대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20개국에서 40여 회의 개인전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일본에서만도 아홉 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미국의 낙서화가인 키스 해링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