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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선]영화 ‘울지마 톤즈’로 보는 고 이태석 신부

그는 아프리카의 나병 환자들을 어떻게 돌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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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0호 편집팀⁄ 2011.02.21 13:52:36

글·윤영상 ysangyn@naver.com 지난 구정 연휴에, 모처럼 휴식을 취하며 TV 편성표를 훑던 중, 유독 눈에 띄는 영화 한 편이 있었다. 아직 극장에서 채 내리지도 않은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 극장에서 개봉 중인 영화가 TV에 옮겨진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지만, 한 종교인의 삶을 다룬 영화가 방영된다는 것에 대해 시청자들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지는 않을까 내심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기우였다. 영화는 추운 날씨만큼이나 꽁꽁 얼어 있던 시청자들의 눈에서 따뜻한 눈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고, 영화 방영 후 포털의 게시판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구분할 것 없이 고 이태석 신부에 대한 찬사로 떠들썩했다. ‘울지마 톤즈’는 오랜 내전으로 인해 짙은 피와 눈물로 얼룩져버린 땅, 아프리카 남수단의 톤즈 마을에서 아이들과 병자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씨앗을 뿌리던 고 이태석 신부의 삶을 담아낸 영화이다. 고 이태석 신부,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됐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아들을 의대에 보내기 위해 고생하신 어머니와 그 때문에 희생 아닌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형제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그에게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누군들 자신을 위해 고생한 가족들에게 호강을 선물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부유한 대한민국에서 가족에게 보답하며 의사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고, 세상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자 가난한 톤즈 마을에서 성직자로, 아니 그곳 주민들의 친구와 가족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고, 결국 헌신적인 섬김 속에서 불치의 병을 얻어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신부, 선교사로서의 삶을 택하게 된 계기는 성경의 마태복음 25장 40절의 말씀이었다고 한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구절이다. 과연, 그는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의사요, 교사요, 신부요, 음악가로서 톤즈의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자신의 온 생애와 온 몸과 온 마음을 바쳤다. 그리고 그 섬김이 가장 두드러졌던 대목은 남수단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가장 버려진 땅, 나병인들의 마을에서 환자들 발의 고름을 직접 짜내고, 그들에게 맞는 신발을 손수 디자인하여 선물하며, 그들의 부서진 몸과 마음을 따뜻한 체온으로 안아내던 모습이었다. 고 이태석 신부의 시선 속에서 그곳 나병 환자들은 분명 그가 섬기는 예수처럼 지극히 큰 존재였을 것이다. 예수가 단지 ‘병 고치는 사람’이 아니었듯 이 신부도 단순히 의사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가르치는 사람으로 그곳에 갔을 것 그렇다면 그가 신부로서 인생의 롤 모델로 삼았던 예수는 나병 환자들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예수도 분명, 나병 환자의 몸에 손수 손을 대고 치유하시며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었지만, 특이한 것은 환자를 치유한 후에 “이 일을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고 이태석 신부가 톤즈 마을에 갔던 이유를 짐작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 이태석 신부는 단지, 톤즈 마을 주민들의 병을 고쳐 주기 위해 간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의사인 그가 굳이 아이들과 밴드를 꾸리고 음악을 가르쳐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톤즈 마을에 삶의 전 영역을 바쳤던 목적은 그 마을에 의술이 아닌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톤즈 마을은 오랜 내전 가운데 있었고, 이웃 종족 간의 약탈과 살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아이들이 총을 멘 어른들로부터 과연 사랑을 배울 수 있었을까. 고 이태석 신부는 자신의 작은 섬김을 통해 사랑을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의술이 아닌 사랑만이 톤즈 마을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고 이태석 신부의 롤 모델이었던 예수 역시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자신을 병 고치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죄로부터 벗어나 사랑이 충만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랐던 것이지, 단지 그들의 필요에 따라 병을 고쳐 주고 물질의 축복을 안겨 주기 위해 사역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병 고침이 아닌, 사랑 가운데 새 사람이 되는 변화를 통해 고통과 절망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율법을 기록한 레위기에 보면 나병 환자들을 격리시키라고 했다. 그것은 유대인이었던 예수가 나병 환자들의 몸에 직접 손을 댄 것과는 매우 다른 태도와 시선이기에 이상하게 느껴진다. 유대인들이 나병 환자를 격리시키고 부정하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목적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의 병과 허물과 고통들이 모두 우리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그러한 율법을 마련했던 것이다. 즉, 고 이태석 신부의 시선이나 예수의 시선은 우리가 나병 환자들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불쌍하다’ ‘안 됐다’ 같은 동정의 시선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던 것이다. 그들은 톤즈 주민과 환자들을 고통과 좌절 가운데 놓이게 만든,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과, 폭력성에 대한 깊은 좌절과 안타까움의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과 경제적 풍요 그리고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에만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또한 봉사 활동의 자리에서조차, 그들을 동정의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 한 주간도 적지 않은 종교인들이 각종 비리와 사기 사건으로 뉴스에 오르고 세상의 입방아에 오르며 고 이태석 신부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는 참으로 그릇된 종교인들이 자신이 믿는 신을, 병을 고치고 대학에 합격시켜 주고, 경제적 풍요를 보장해 주는 사람 정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가 나병 환자를 고친 후 이 일을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신 것이지 않겠는가. 우리가 나병 환자를 볼 때 느껴야할 감정은 단지 동정심인가, 아니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안타까움의 감정인가. 장 지글러의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란 책을 읽어 보았는가. 굶주림의 이유가 단지 식량 부족이었던가. 인류의 이기심이었던가. 우리에게는 고 이태석 신부 같은 의술도, 음악성도, 교육적 재능도 없다. 그런 이유로 세상의 아픔과 눈물에 눈감은 채, 내 현실적 욕망만을 쫓으며 오늘도 살아갈 것인가. 그것은 외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극적 폭력이다. 톤즈 마을을 괴롭힌 것은 병균보다는 세상의 메마른 정서였을 것이다.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 신부의 죽음 앞에서 ‘사랑해 당신을~’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글썽거린 이유를 생각해 보자 병에 걸렸을 때 진통제를 복용한다고 해서 그 병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톤즈 마을의 가난과 고통은 병의 증상일 뿐, 고질적 원인은 남수단과 주변 나라들에 팽배했던 증오와 폭력과 이기심이었다. 고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난 후, 톤즈 마을이 다시 절망과 눈물 가운데 방치된 것처럼, 단지 구제 활동을 통해 병의 증상을 고치는 일만으로는 근원적인 해결을 도모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 이태석 신부가 톤즈 마을에서 정말 고귀하고 멋진 씨앗을 뿌렸구나 싶었던 것은, 톤즈 마을의 어린이들에게서, 절망과 눈물 가운데 한 줄기 사랑이 싹터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톤즈의 어린이들은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로써, 서툰 한국말로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곡을 흐느끼며 노래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그들의 검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것은 절망이 아닌 사랑의 눈물이다. 톤즈의 어린이들은 원래 울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고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서 그들 마음에 따뜻한 눈물과 함께 사랑이 싹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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