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가 노래를 잘하는 건 당연하다.” 어느 뮤지컬 제작자의 말이다. 특히 이 배우를 보면 떠오르는 말이다. 강태을(31)은 뮤지컬 배우 중에서도 노래를 잘하는 배우다. 그의 노래엔 가슴을 뻥 뚫는 힘이 있다. “노래만 잘할까요? 다른 건 별론가요(웃음)?”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연습실이 있는 남산창작센터에서 만난 강태을은 ‘노래를 잘한다’는 기자의 칭찬에 수긍하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이내 다른 칭찬을 바랐다. 그 표정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강태을은 3월 1일 서울 충무아트홀 대극장에서 개막하는 ‘몬테크리스토’에서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관객을 만난다. 줄곧 주연으로 활동해온 배우가 조연으로 ‘내려오는’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더욱이 그가 맡은 ‘몬데고’는 ‘몬테크리스토’에서 미움받는 악역이다. “지금까지는 제가 중심이고 주연인 작품만 해왔는데, 막상 조연을 해 보니 저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됐어요. 조연 배우가 갖는 힘이 따로 있더라고요. 등장 신이 주연에 비해서 적지만 나오는 장면마다 제 몫 이상의 것을 해내요. 그래서 조연과 주연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잖아요. 저는 이번에 조연을 하면서 제가 하는 신에 대해 저의 몫 이상의 것을 해내려고 해요.” 가수 꿈, 뮤지컬, 극단 사계 강태을 하면 일본의 유명 극단 ‘사계(四季)’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곳에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약 5년 동안 뮤지컬 배우의 기본기를 다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시몬 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강태을은 이후 ‘아이다’ ‘캣츠’ 등 대작 뮤지컬에서 주요 배역을 섭렵했다. “일본에 처음 도착해 1년 동안은 청소와 발레, 재즈, 발성 연습, 일본어 수업, 개인 연습, 컴퍼니 연습, 또 개인 연습 등 일과가 너무 많아서 많이 먹어도 살이 빠졌어요. 제 키(182cm)에 63kg이 나간 적도 있어요. 고생은 많이 했지만 그 일 년은 저를 칭찬해주고 싶은 기간이기도 합니다. 사계는 배우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테크닉과 인성을 키워주고 만들어 주는 곳이에요. 시스템 자체는 딱딱하지만 배우에게는 전문적인 트레이닝과 집단생활, 약속의 중요성 등을 가르쳐 주죠.” 10년 넘게 무대에서 활동했지만 강태을의 원래 꿈은 가수였다. 연기는 ‘좋은 가수가 되려면 일단 연기부터 배우라’는 아버지(연극연출가 강만홍 씨)의 조언 때문에 시작했다고 한다. 그랬던 연기 공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배우의 기본기를 다진 강태을은 일본보다 더 뛰어나다고 믿는 한국 배우의 감성을 익히기 위해 일본 생활을 과감하게 접었다. 그의 한국 활동은 한마디로 ‘승승장구’했다. ‘대장금(조광조 역)’ ‘록키호러쇼(프랑큰 퍼터 역)’ ‘돈주앙(돈주앙 역)’ ‘어쌔신( 암살자 존 부스 역)’ ‘헤드윅(헤드윅 역)’ 등 인기 뮤지컬에서 언제나 멋진 주연을 맡아 관객을 사로잡았다. 특히 ‘돈주앙’ 때는 350대 1의 어마어마한 오디션 경쟁률을 뚫고 주연 자리를 꿰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역할 복에 상복도 있다. 2009년에 그는 제3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남우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남성적인 인상, 강하거나 트랜스젠더이거나 훤칠한 키, 남성적 얼굴, 멋진 목소리…. 강태을은 누가 봐도 남성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이미지 때문일까? 그는 실제로 강렬한 역할들만 맡아왔다. 그중에는 트랜스젠더도 있지만 강태을의 남성적인 꺼풀은 감출 수 없었다. “작품을 고를 때는 새로운 역할에 중점을 많이 두는 편이에요. 지금까지 해온 캐릭터 중에 겹치는 역할은 하나도 없습니다. ‘올댓재즈’ 또한 해보지 않은 캐릭터고, ‘몬테크리스토’의 악역도 처음이고요.” 강태을은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역할 해석의 폭이 점점 넓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 이같은 생각은 ‘의식 있는 배우가 되겠다’는 철칙이 생긴 뒤부터 더 강해졌다. 최근 작품을 선택할 때는 다른 것보다 먼저 ‘연기 공부가 될까?’를 따져본다고 한다. 그는 요즘 ‘올댓재즈’ 공연과 ‘몬테크리스토’ 연습이 겹치면서 정신없이 바쁘지만 ‘몬테크리스토’ 연습이 오히려 ‘올댓재즈’에 플러스 효과를 준다고 말했다. “매일 새로운 느낌으로 공연하는 것 같다. 바쁜 일정인데도 피곤함을 모르겠다”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강렬한 인상이나 역할 때문에 강태을의 코미디나 로맨틱한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대해 강태을은 이 같이 항변한다. “32살이지만 저 아직 애예요 애. 어리광이 얼마나 많은데요. 여자친구나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 있으면 가끔 주위에서 ‘왜 혀 짧은 소리를 내냐고’ 할 정도입니다. 수줍음도 많이 타고요. ‘김종욱 찾기’ 같은 로맨틱한 작품에 출연하면 저의 로맨틱한 모습을 보실 겁니다.”
강태을의 첫 악역 ‘몬데고’ “어느 날 ‘몬데고’ 역할로 러브콜이 들어왔어요. 악역은 해본 적이 없었죠. 배우로서 할 게 있겠단 생각에 오디션을 봤어요. 몬데고는 메르세데스를 사랑하는 남자에요. 하지만 그 사랑은 한 여자를 갖고 말겠다는 애증과 집착으로 발전하죠. 결국엔 빈껍데기만 갖게 되는 불쌍한 남자이기도 하고요.” 프랑스 소설 ‘삼총사’를 쓴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몬테크리스토’는 에드몬드 단테스(몬테크리스토 백작)가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인 메르세데스를 빼앗기고 14년 동안 감옥에 갇힌 뒤 탈출해 복수하는 내용이다.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인 이 작품은 지난해 국내에서 초연됐으며, 올해로 두 번째 공연을 맞는다. 강태을이 캐스팅된 ‘몬데고’는 친구의 애인을 빼앗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가 결국엔 비참한 최후를 맞는 역할이다. 이 역할은 작년에 최민철이 연기해 2009년 제16회 한국뮤지컬대상 남우 조연상까지 받았다. 강태을은 그런 최민철과 올해 이 역할에 더블 캐스팅됐다. “(최)민철 형은 몬데고를 정말 잘 만들어줬어요. 형과 더블 캐스팅돼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래도 배울 점은 참 많아요. 실제로 너무 잘 가르쳐 주고 있고요. 어쩌면 상을 받은 형이 저보다 더 부담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이걸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꼭 상을 받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몬데고는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한 남자다. “나라도 사랑을 선택할 것 같다”는 강태을은 “동성 친구와의 우정도 중요하지만 이성 친구와 함께하는 게 내겐 더 중요하다.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진다면,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연인을 구할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동안 어떤 역할을 맡아도 관객의 지지를 받아온 강태을이지만, 몬데고는 비열한 악역이기 때문에 관객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 또한 그에게 색다른 경험이 아닐까? 이에 대해 그는 “많은 사람이 나더러 악역과 잘 어울린다고 하지만 솔직히 어색한 기분이 든다. 내 안에 있는 비열함을 찾아야 하는데 내가 생각보다 정직한 사람이다. 이제까지 해본 가장 나쁜 행동은 불법 유턴과 몰래 쓰레기를 버릴 때 정도”라면서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몬데고에게 최대한 자신의 비열함을 꺼내 보이겠다는 강태을은 “‘몬테크리스토’의 다음 공연 때는 주인공 몬테크리스토로 무대에 꼭 서고 말겠다”고 욕심을 보이면서 “만일 그렇게 된다면 더 큰 성취감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잘할 수 있는 작품은 더 준비된 다음에 강태을은 ‘올댓재즈’를 하기 전 6개월 동안 공연을 쉬었다. 그 와중에 ‘아이다’의 오디션이 지나갔다. ‘아이다’의 남자 주인공 ‘라다메스’는 강태을이 늘 꿈꿔온 역할이다. 강태을은 아담 파스칼(뮤지컬 ‘렌트’ 주인공)의 라다메스에 반했다고 한다. 현재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아이다’에는 김우형이 라다메스 역으로 출연 중이다. “‘아이다’ 오디션 공고가 떴을 때는 무척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시는 배우로서 힘든 시기였어요. 많이 지쳐 있었죠. 지금의 내겐 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고 큰마음을 먹고 오디션을 포기했습니다. ‘아이다’ 공연을 보고 와서는 아쉽다 했지만요. 물론 원 캐스트도 상관없어요. 일본에서 배워온 철저한 관리가 몸에 배었거든요.” 불과 2년 전에는 뮤지컬 외에 다른 장르에 고개를 돌리지 않던 강태을은 최근 생각을 바꾸었다. 발전적인 연기를 위해서라면 연극, 정극, 실험극, 퍼포먼스, 방송, 영화 등 매체를 가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커졌기 때문이다. 10년 뒤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하자 그는 이 같이 말한다. “하고 싶거나 잘할 수 있는 역할보다 노력해서 잘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더 다양한 창작 작품에 도전해서 배우로서 더 성장하고 싶습니다. 10년 뒤에는 지금까지 제가 해온 작품들을 다시 하거나 40대 초반에 ‘지킬앤하이드’와 ‘헤드윅’을 할 생각입니다. 라다메스는 30대 후반쯤 하고 싶고요. 제일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작품은 시간이 지나고 준비가 됐을 때 하려고요.” 인터뷰 말미에서 갑자기 가수가 되겠다던 강태을의 원래 꿈이 궁금해졌다. ‘포기했느냐’고 묻자 강태을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목청을 높인다. 데뷔시기를 늦췄을 뿐이라고 강조하는 강태을. “가수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시작할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뮤지컬 배우로서 살아온 제 인생이 묻어 있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