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지나간 세월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의 끊임없는 교차로 이뤄진다. 때론 슬프기도, 때론 기쁘기도 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앞으로도 이야기를 만들어 가게 된다. 그 이야기는 추억이 되고, 기억이 되고, 이어지기도 또는 끊기기도 하면서 얽히고설킨다. 복잡하지만 결국 지금 살고 있는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모여 기억과 추억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마포구 창전동 작업실에서 만난 최영욱 작가는 달항아리를 그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달항아리와 닮아 있는 이미지를 그린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달항아리에는 기억이 있고 추억이 있고 삶이 담겨 있다. “나의 그림은 기억의 이미지화에요. 기억은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미지를 통해 기억은 표출되는 거죠. ‘지각과 경험의 울타리’(기억)에 근거해 어떤 의도가 시도되고 감정이 표출되고 소재나 재료, 색감이 선택되고 이것은 어떤 이미지를 만들게 돼요. 결국 내가 표현한 이미지는 내 삶의 기억이자 이야기들이 되는 거죠.” 삶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그려온 그는 처음부터 항아리를 그리지 않았다. ‘어느날 이야기’라는 주제로 도시와 들판 등 자신만의 일기를 쓰듯 주로 풍경을 그린 작품이 많았다. 삶과 이야기는 여전히 담기지만 지금과는 정말 많이 다른 작품이다.
그러다 달항아리는 만나게 된 계기는 5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항상 자신만의 색과 이야기를 찾던 그는 당시 기존 그림과는 다른 변화를 주려고 고민하며 서점이나 박물관 등을 둘러보던 차에 무언가에 이끌리듯 유독 ‘달항아리’ 작품이 눈에 들어왔고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한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달항아리가 아닌 마치 자신의 삶과 이야기가 담긴 모습으로 보였다. 그가 그리는 달항아리를 자세히 보면 수없이 많은 선들이 존재한다. 마치 빙열(얼음처럼 갈라진 자기 표면의 유약 균열)을 그대로 표현한 듯한 모습이다. 그가 중시하는 점이 바로 선으로 이어지는 드로잉이기 때문이다. 이는 도자기를 그리는 다른 작가들과의 차별점이다. “도자기를 구우면 생기는 균열이 마치 인간의 삶처럼 느껴졌어요. 그 선은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요. 나의 삶이 되고, 인생의 길이 되고, 우리 동네 골목길도 되죠.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삶의 과정처럼 선들이 이어지고 끊어지고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죠. 항아리 속 보이지는 않지만 그 속에 담긴 풍경과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하고 싶었어요.” 그가 그리는 항아리는 볼륨감을 없애고 최대한 평면적으로 보이도록 그려졌다. 먼저 사진이나 실물을 보고 형태를 잡는다. 닮아보이게 그리는 작품도 있지만 형태를 변화시켜 작업한다. 젯소(아크릴물감이나 페인트 등을 칠하기 전에 먼저 바르는 것으로 페인트가 잘 스며들도록 하는 보조재)로 항아리 형태를 두껍게 바르고 사포질을 해서 표면을 도자기처럼 만든다. 그리고 동양화 물감으로 마치 시간과 세월을 나타내듯 흔적을 남긴다. 그 위에 수많은 선들을 어떤 계획도 없이 마음가는대로 그려나간다. 거미줄처럼 또는 손금처럼 그려진 선들이 산이 되고 동네 골목길처럼 느껴지도록 말이다. 그 속에는 고향이 있고 우리 동네가 있고 옛 추억에 자리한 풍경이 되기도 한다.
“내 삶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어요. 달항아리를 조용히 바라보면 나를 찾는 느낌이 드는데 그런 느낌을 전해줬으면 해요. 나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닫게 되고 그 과정에서 소통이 이루어져요. 내 그림은 결국 그 소통을 위한 매개체죠. 과거와 현재, 나와 너를 잇는 소통의 매개체가 바로 내가 표현한 기억의 이미지들이에요. 단순한 항아리가 아닌 우리 주변 모두의 이야기가 있고 나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도록 말이죠.” 그의 작품은 무언가 특별한 기법이 있을 법도 하지만 여러 기법을 쓰지 않고 순수하게 그려나가는 작업이다. 도를 닦듯이 하나하나 그려나가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투자된다. 무엇보다 선을 중시하는 그에게 가장 어려운 점은 외곽선 즉 형태다. 우연히 선이 나오는 순간이 있는데 똑같이 그리려면 절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달항아리의 매력은 바로 약간 엉성함에서 나오는 세련미이기에 우연적 형태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점 중 하나다. 먼가가 어색하면서 소박함 속에 자연스러움이 배어 나오는 모습이 가장 한국적인 멋이라고 한다. 그는 현대적으로 외곽선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런 형태의 세련미(옛 도공들의 느낌)를 더 공부해야겠다며 웃어 보였다. 한국적인 멋을 잘 나타낸 그의 작품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좋은 반응을 보인다. 2010년 12월에 열린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아트페어에 소개되면서 빌게이츠재단 사옥에 100호 작품 3점과 필라델피아 뮤지엄에 2점이 소장되는 큰 성과를 이뤘다. 앞으로 해외에서 더 많은 전시를 해보고 싶다는 그는 한국의 멋과 역사를 알리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올해는 그에게 있어 중요한 해가 된다. 지난 5년간 그려온 달항아리를 총정리 하는 화집을 준비하고 있으며 하반기에 큰 규모의 개인전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한줄 한줄 정성스럽게 그려가는 이야기는 더 많은 달항아리에 담겨 그 안에서 우리는 삶과 추억을 찾는 끝없는 여정을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