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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신소영展 이화익갤러리 3.2~15

‘연속적으로 변해가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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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2호 박현준⁄ 2011.03.07 13:13:08

고충환 (미술평론가) 신소영은 작가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다.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이고 싶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고 어른이 아닌 아이의 모습과 시선으로 세상 속에 있고 싶고, 세상을 보고 싶다. 이 노트처럼 작가의 그림엔 어린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자신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작가 속에, 우리 모두 속에, 어른들 속에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은 부재하는 유년시절을 대리한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되불러온다는 것은 곧 부재하는 존재와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 그 순간을 되새김질하는 것. 작가는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그 눈에 비친 세상은 ‘어린 왕자’처럼 이상적이기도 하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때론 ‘양철북’에 등장하는 오스카처럼 시니컬하기도 하다. 순진한가 하면, 순진함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다. 이처럼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이 순진하지가 않은 것은 그의 이상과 환상이 사실은 현실원칙에 위배되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하게 해주는 장소며 지점들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보는 어린아이의 눈엔 어른의 욕망이 투사돼 있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세계에 성공적으로 편입하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억압된, 그리고 거세된 욕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 작가의 그림에는 곧잘 쌍둥이로 보이는 두 아이들이 등장한다. 남자아이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여자아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어린아이들은 그저 쌍둥이라기보다는 자기와 또 다른 자기가 대면하는 내면적인 경험의 경우로 보인다. 현재의 자기와 과거 속의 자기, 의식적인 자기와 무의식적인 자기가 서로 만나지는 것. 일종의 자기분신이며 아바타며 얼터에고와 만나지는 이 경험을 통해서 작가는 또 다른 자신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안부를 물을 수가 있게 되고, 전작에서처럼 속말을 공유할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특히 쌍둥이 여자아이들이 등장하는 그림‘한번만’이 흥미로운데,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아이 중 한 아이는 목줄을 맨 아기 곰을 줄 끝에 붙들고 있고, 맞은편의 또 다른 아이는 그 품에 곰 인형을 껴안고 있다. 전작에서 토끼와 토끼 인형이 대비되는 그림과도 통하는 이 그림에서의 제목 ‘한번만’의 의미는 저 곰을 한번만 꼭 껴안아봤으면 하는 욕망의 말줄임표로 이해할 수 있을 것. 여기서 곰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편입하기 위해서 억압했던 욕망을, 야생과 야성을, 자연성과 본성을 상징한다. 결국 이 그림은 자신의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과, 그 욕망이 억압되면서 생겨났을 상처의식과 대면하고 화해하는 제스처를 암시한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아이들은 사실은 어른을 연기하고, 어른들의 욕망을 대리한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사뭇 진지한 표정이 마치 자기 내면과 대화하는 것 같고, 흡사 각자에게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일종의 상황극 내지는 역할극을 보는 것 같다. 그 극장 속에서 나의 성장은 어린아이에서 멈춰서버렸다. 적어도 그 욕망의 극장 속에서만큼은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로 머물 수가 있다. 그리고 극장 밖에서 나는 아마도 그 어린아이가 욕망했을 나와 다른 나를 발견한다. 극장 속의 나와 극장 밖의 나 사이에서 나는 흔적도 없이 산화해버린, 도무지 재구성할 수조차 없는 무수한 나를 떠올린다. 내가 미처 기억할 수조차 없을 만큼 까마득해져버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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