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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 에세이]‘거미손’ 유전병 걸린 천재 작곡·지휘·연주가

라흐마니노프, 고향 러시아 떠난 뒤 향수병에 시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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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4호 박현준⁄ 2011.03.21 13:51:35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음악적으로 18세기와 19세기가 오스트리아(비엔나)와 독일이 지배하던 200년이었다면, 20세기는 러시아의 100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뛰어난 작곡가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 모두가 러시아 출신이다. 그리고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의 최고 연주자들도 거의 모두 러시아 출신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43년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평생 담배를 많이 피워서 각혈을 하기도 했으며 흑색종이란 피부암으로 사망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혁명이 터진 1917년 러시아를 탈출하였는데 40년을 미국과 유럽에서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조국을 한 번도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2007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과 인생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DVD로 나왔는데 전 세계에서 유명한 지휘자의 한 사람인 러시아의 발레리 게르기예프(Valery Gergiev)가 지휘를 하고 영국의 유명한 셰익스피어 배우인 존 길거드 경(Sir Gielgud)이 라흐마니노프의 편지를 낭독하는 내용의 영화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톨스토이, 레닌, 러시아 혁명이 나오는 역사적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슬픔의 수확(The Harvest of Sorrow)’인데 이것은 그가 노래집을 출판할 때 사용한 제목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고향을 잊지 못해 영원히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유령”으로 표현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 그리고 ‘심포니 2번’ ‘심포니 3번’은 전 세계의 콘서트홀에서 자주 연주된다. 그리고 그의 ‘전주곡(Prelude)’과 ‘광시곡(Rhapsody)’도 많은 사랑을 받는 음악이다. 2008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아바도의 지휘로 에렌 그리모우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는 실황이 DVD로 나와 있다. 유부녀 집시와 사랑에 빠졌다가 버림 받은 그는 첫 작곡한 작품을 그녀에게 바쳤지만 지휘자가 술먹고 연주하는 바람에 엉망이 되고… 이 협주곡의 1악장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가장 러시아적인 음악의 하나일 것이다. 이 음악을 들으면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을 연상케 한다. 라흐마니노프의 부모는 양가 모두 장군 출신의 대지주들이었다. 그리고 부모님 모두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는데 라흐마니노프는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여자와 술을 좋아하고 도박에 빠져 빚을 갚기 위해 농장과 저택을 팔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갔는데, 그 후 영원히 집을 떠나버렸다. 라흐마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2년간 공부를 한 다음 모스크바로 가서 피아노와 작곡 공부를 하였다.

그는 매년 시골 이바노브카(Ivanocka)에 있는 외가의 대농장과 대저택에서 여름을 보냈는데 그곳이 라흐마니노프의 정신적인 고향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집시인 아나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이미 유부녀였다. 그는 열아홉 살의 학생 신분으로 첫 오페라 ‘아레코(Aleko)’를 작곡하여 금메달과 피아노를 받았는데 1막 오페라는 한 청년이 집시 여인과 사랑에 빠져 그 여인이 아이를 낳은 후 떠나버리는 내용이다. 자신의 첫사랑 아픔을 작품에 담은 것이다. 이후 스물세 살의 나이로 첫 ‘교향곡 1번 Op. 13’을 작곡하여 다음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 홀에서 초연을 했으며, 이 곡을 자신을 떠난 집시 여인에게 바쳤다. 그러나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쿠이 같은 러시아 음악의 대부들이 심하게 혹평을 하자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우울증에 빠져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약 3년간 작곡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자면 그 지휘자가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상태에서 지휘를 해 이 심포니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던 것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변수는 그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음악계는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하였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악인들이 이를 차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는 용기를 얻어 1900~1901년 사이에 ‘Piano Concerto 2번’을 작곡하여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1902년에는 외사촌인 나탈리아(Natalia)와 결혼하여 이 두 사람은 끝까지 인생을 함께했다. 그 당시 러시아 정교회는 사촌간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사촌간의 결혼은 종종 있었다. 러시아의 또 다른 천재적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도 사촌과 결혼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지휘도 잘 하였으며 볼쇼이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나(1904~1906) 정치적인 이유로 사임했다. 그는 1909년에는 미국에서 ‘피아노협주곡 3번’을 초연했으며 그 후 미국에서 많은 작품들을 지휘하였다. 러시아에서 붉은 혁명이 일어나자 대지주 출신의 라흐마니노프 가족은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당장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스웨덴 왕자가 그를 초청해 1917년 12월에 두 딸과 함께 스웨덴으로 떠났으며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18년 11월 미국으로 향했으며 1919~1920년 4개월 동안 40회의 연주를 하고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영어를 못했지만 러시아 비서, 러시아 요리사, 러시아 기사를 두고 살았으며 미국 사회에 흡수되거나 적응하지도 않았다. 또한 일요일마다 교회로 가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정교를 굳게 믿었다. 흔히 미국은 여러 민족의 용광로라고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변할 줄 모르는 러시아인이었다. 아니, 변하기를 거부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그는 마치 러시아를 떠날 때 그의 영혼을 거기에 두고 온 듯 작곡을 거의 중단하였지만 미국에서 20년간 1,000번의 연주를 했다. 그는 많은 리사이틀을 “아무 느낌 없이 했다”라고 편지에 썼다. 아마 가족을 부양하고 상류 사회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연주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 몽퇴, 푸르트벵글러 같은 유명 지휘자들과 함께 연주를 하면서 당시 최고의 비르투오소(Virtuoso, 연주의 대가)가 된 것이다. 영혼을 러시아에 두고 온 듯 미국에서는 오래 살면서도 작곡을 못하고 연주만 했던 그는 스위스로 옮겨서야 겨우 작곡을 다시 시작. 1927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초연했지만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그의 팬들은 불같은 열정의 새로운 협주곡을 원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그런 곡을 작곡하지 못했다. 그는 새로운 걸작을 작곡하기 위해서 자신이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첫사랑에 빠졌던 그리운 고향땅의 흙냄새가 필요했지만 물질문명의 왕국 미국은 그런 영감을 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 생활에 피로와 염증을 느낀 그는 파리로 떠났으며 드디어 스위스의 평화로운 루체른 호숫가에 집을 짓고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살면서 작곡을 시작해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광시곡’과 ‘교향곡 3년 Op. 44’를 완성했다. 1930년대에 러시아에는 숙청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죄 없는 사람들을 수없이 살해하고 예술가들을 탄압하였는데 그때 라흐마니노프는 ‘뉴욕타임스’에 기사를 쓰면서 “러시아에 자유로운 예술은 없다. 오로지 억압 받는 예술가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직업적 살인자”라고 규탄했다. 그러자 러시아에서 그의 음악은 모두 금지되었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전운이 감돌자 그의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베버리힐즈에 정착하였으며 1943년 악성 피부암으로 사망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손가락이 유난히 가늘고 길어서 피아노를 치는 데 유리했는데 몸집도 날씬하고 키도 컸다. 또 다른 피아노 거장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와 반 클라이번도 비슷한 체구와 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유전병인 마르팡증후군의 특징인데 전문가들은 라흐마니노프가 이 병을 앓았으리라 추측한다. 이 병의 별명은 거미손가락(Arachnodactyly)인데, 그렇게 생긴 손이 피아노 연주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음악인으로서 세 마리 토끼를 쫓아 모두 다 잡은 사람이다. 피아노 연주는 전설적이었으며, 그의 지휘는 가는 곳마다 찬사를 받았고, 감동적인 음악을 유산으로 남겼다. 음악 역사에 이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음악가는 거의 없으며,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그런 사람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레너드 번스타인은 피아노 연주자로서는 명성을 떨치지는 않았다. 파가니니와 리스트도 유명한 작곡가이자 탁월한 비르투오소였지만 그들에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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