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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19] 삼천사-진관사 下

어지러운 세상…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언제나 정갈하며 평화로운 진관사 절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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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4호 박현준⁄ 2011.03.21 13:54:03

옛 삼천사 터를 떠나 진관사로 향한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길은 산보길이며 다른 한 길은 등산길이다. ▲ 산보 길 올라 왔던 길을 거꾸로 되짚어 내려간다. 삼천사 지나, 시멘트로 포장된 계곡 건너고 삼천사 적멸보궁을 알리는 돌기둥 안내석을 지나치는 순간 좌측 계곡 쪽으로는 국가시설 수영장 펜스가 끝나는 지점에 도달한다. 길은 약간 고도가 떨어지면서 ‘청솔집’이라고 쓴 물가의 음식점 안내 설치물이 펜스 옆에 세워져 있다. 주위에는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이 길을 따라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길이 없을 것 같은 위치에 개울을 건너가는 시멘트 구조물이 있다. 개울을 건너면 고즈넉한 언덕길이 나타난다. 진관사에서 삼천사로 넘어올 때는 쉽게 이 길을 찾을 수 있으나 삼천사에서 진관사로 넘어 갈 때는 많은 사람들이 길 찾기에 애먹는 곳이다. 고개는 응봉(매봉) 능선 끝자락을 넘는 것인데, 약 5분 오르면 고갯마루에 닿는다. 그곳에 길안내 이정표가 서 있다. 사모바위 2.9km, 삼천사 탐방지원센터 0.2km, 진관사 0.1km 등…. 고갯마루에서 내려가기를 100m, 진관사 사적비와 공적비, 근래에 검은 오석으로 만들어 세운 큰 비 두 기(基)가 길손을 맞는다. 이곳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서울 역사박물관이 발굴을 하던 자리였는데 이제는 발굴이 완료됐는지 파냈던 곳을 가지런히 해 놓았다. 옆으로 항아리형 부도(浮屠) 한 기와 송덕비 두 기가 서 있다. 한 비(碑)에는 정삼품전공사명소교송덕비(正三品全公士明召橋頌德碑), 또 한 비에는 정삼품전공사명자선송덕비(正三品全公士明慈善頌德碑)라는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정삼품의 품계를 받은 정사명공의 소교와 자선을 기리는 비인 것이다. 이 분의 행적은 또 하나의 송덕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쌍정2리에는 1921년에 세운 고양군 용강면 전공사명자선송덕비(高陽郡 龍江面 全公士明慈善頌德碑)가 있다. 이 분은 지금의 신촌 마포를 아우르는 지역에 사셨던 분인데 흉년에 곡식을 풀어 긍휼(矜恤: 빈민 구제)에 앞장섰다. 이 분의 송덕비 두 개가 이 곳 진관사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볼 때 그 당시 고양군 은평면이었던 이 지역에서도 많은 자선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 진관사 계곡에는 초등학교 시절 여러 번 소풍 왔고 그 후로 수 십 번은 다녀갔던 곳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없으니 부도도 송덕비도 무심히 보고 지나쳤던 것이다. 모든 것은 관심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보인다. 이윽고 한글 편액으로 ‘삼각산 진관사’라고 쓰인 일주문 안으로 들어간다. ▲ 등산 길 이왕 답사에 나선 김에 땀도 좀 흘릴 분들은 사모바위에 오를 만하다. 옛 삼천사 터를 떠나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잠시 오르면 계곡길이 갈라지면서 우측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타난다. 많은 사람이 다니는 등산로는 아니기에 북한산 다른 등산로에 비해 주말에도 붐비지 않는다. 한 시간여 땀 좀 흘리면 승가봉과 사모바위 사이 능선으로 오르게 된다. 이 능선에서 좌로 가면 승가봉, 청수동암문, 대남문 방향으로 가고 우로 가면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 방향으로 가게 된다. 마음 부산한 날, 억울한 날, 스산한 날… 이곳에 오면 마음의 고요가 되찾아진다. 이런 장소 하나씩 갖고 계신가요? 여기서 방향을 우향우 사모바위 방향으로 잡는다. 약간 비탈길을 오르면 5분이 안 돼 사모바위 앞 넓은 공터에 닿는다. 흔히들 물도 마시고 간식도 하는 쉼터다. 앞으로는 사모(紗帽)를 꼭 빼어 닮은 바위가 수만 년을 떨어질 듯 떨어질 듯 꿈적도 않고 놓여 있다. 사모(紗帽)란 벼슬아치들이 실내에서 쓰던 모자다. TV 사극에 많이 등장하고 폐백 드릴 때 신랑들이 쓰는 관(冠)이 사모인데, 그래도 떠오르지 않으면 옛무덤 앞의 문인석이 쓰고 있는 관을 생각하면 된다. 이제 진관사(津寬寺)를 향해 응봉능선으로 내려온다. 응봉능선(鷹峰稜線)은 삼천사와 진관사를 가르는 북한산 서남쪽에서 의상봉 능선 다음으로 멋진 능선길이다. 이 능선을 타면 맑은 날은 인천 앞바다 섬까지 점점이 보인다. 약간의 바위 길도 있어 아기자기한 맛을 즐길 수 있다. 30여 분 내려오면 이 능선의 이름을 낳게 한 응봉(鷹峰: 매봉)을 지난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많은 응봉/매봉이 있다. 흔히 옛적에 매(鷹)가 살아서 매봉이 되었다든지, 매사냥꾼이 이 봉우리에서 매사냥을 해서 매봉(鷹峰)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앞마을에 살던 이들이 뫼(山)라 부르던 말에서 생긴 경우가 훨씬 많다. ‘삼돌이 어디 갔냐?’ 이렇게 주인 영감이 찾으면 ‘예, 삼돌이 앞 뫼에 나무 갔시유’ 이러던 뫼(山)가 ‘뫼봉’이 되었다가 부르기 편하게 ‘매봉’이 되고 지도를 그리면서 한자로 표기하니 다시 매(鷹)가 된 경우가 많은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이름이 지어지면 거기에 전설이 생겨나는 법이다. 아마도 이곳의 응봉도, 옥수동 옆 응봉동의 응봉도 이렇게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매(鷹) 이야기가 훨씬 꿈이 있으니 덮고 가자. 이윽고 진관사에 도착한다. 만약 한여름에 이 길을 간다면 능선 길보다 계곡 길을 권한다. 사모바위에서 능선을 따라 500m쯤 가면 비봉 지나 진관사 하산 이정표가 나온다. 이 하산길이 진관사 계곡 코스다. 필자가 자주 내려오는 길인데 눈 쌓인 날은 눈의 즐거움, 여름 날에는 계곡 물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더할 수 없이 좋다. 단 하나 하산 마지막 구간이 다소 험하니 조심조심 하시기를. 이제 진관사 대웅전 앞 절마당으로 들어선다. 진관사 절마당은 언제나 정갈하면서 평화롭다. 햇볕이 파삭파삭 부서지면서 내려앉은 절마당은 내게 평화를 준다. 마음 부산한 날, 억울한 날, 뭔가 스산한 날… 이곳에 오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의 고요를 찾을 수 있다.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곳들이 생기는데 나에게도 내가 좋아하는 곳, 때 되면 가보고 싶은 곳, 그런 곳들이 있다. 진관사 절마당도 그런 곳 중 하나다. 대웅전 기둥에는 6줄의 주련(柱聯: 기둥에 붙인 글)이 걸려 있는데 그 중 한 구절이 마음을 잡는다. ‘인연 따라 이르러 두루 미치지 않음 없네(因緣赴感靡不周)’. 사람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가는 곳도 그렇고… 마음이 가면 인연이 생기고 발걸음도 미치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려니. ▲ 진관사(津寬寺) 고려와 조선에 걸쳐 왕실(王室)과 인연이 많은 절이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에 진관사와 관련된 기사가 많은데 간추려 살펴보고자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진관사의 전신이랄 수 있는 신혈사(神穴寺) 이야기가 나온다. 진관사 서북쪽에 있던 조그만 절인데 아직도 그 위치를 찾지 못해 안타깝다. 역사박물관에서 발굴한 일이 혹시 신혈사의 흔적을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때는 고려 7대 왕 목종 때의 일이다. 목종의 어머니는 그 유명한 천추태후(千秋太后)인데 외척 김치양과 사통해 사생아를 낳았다. 이 천추태후의 욕심이 사생아에게 고려의 대통을 잇게 하고 싶어서 유일한 후계자 대량원군(후에 8대 현종이 됨)을 암살하려 하였다. 대량원군은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왕후의 아들인데 큰 이모로부터 암살의 위험에 드리워진 것이다. 12살에 개경 남쪽 숭교사(崇敎寺)의 승려가 된 후 암살 위험을 피해 삼각산 조그만 절(절 이름 미상, 후에 신혈사로 부름)로 옮겨 진관대사의 보호를 받았다. 천추태후가 자객을 보낼 때마다 진관대사는 부처님 단 아래에 굴을 파고 대량원군을 숨겨 그 목숨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 강조의 정변으로 7대 목종이 폐위되자 대량원군은 8대 현종으로 등극한다. 그래서 자신이 숨어 목숨을 구한 굴을 신혈(神穴: 신의 도움을 입은 굴)이라 부르고 절 이름을 신혈사로 개칭하는 한편, 진관대사를 위해 번듯한 절을 지으니 그 절이 대사의 이름을 딴 진관사(津寬寺)다. 세상이 색스러워졌다고 한탄하시는 분들, 고려사를 읽어 보라. 남녀상열지사가 자연스러운 당시와 비교해 지금이 색스러운가? 여기서 고려 초기의 근친혼(近親婚)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근친혼 이야기가 나왔으니 친구들 술자리 농담 한 마디 전하려 한다. “요즈음 마누라 곁에는 자주 가느냐?”고 한 친구가 물으면 으레 대답이 “마누라 곁에 가는 것은 치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수십 년 가족으로 지내는 사이에 마누라 곁에 가는 것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이니 차마 그 짓을 할 수 없다”고.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으로부터 아들 25명, 딸 9명을 낳았는데 딸 9명 중 8명이 배다른 오빠들과 결혼하였다. 또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현종의 어머니 헌정왕후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은 자매 사이로 태조의 아들 대종의 딸이니 태조 왕건의 손녀딸들이다. 그런데 요새 기준으로 보면 성(姓)은 왕(王) 씨이지만 어머니 성을 따라 황보(皇甫)씨가 되었다. 이들은 사촌오빠인 5대 경종의 제3부인, 제4부인이 되었다가 경종 사후(死後)에 사가(私家)로 나왔다. 사가로 나온 후 천추태후(경종비로 보면 헌애왕후)는 외척 김치양과 사통하여 사생아를 낳고, 헌정왕후는 숙부 왕욱과 사통해 대량원군(후에 현종)을 낳았다. 우리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배운 고려 가요는 이러한 사회의 가치관을 그대로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요사이 우리의 가치관으로 보면 있을 수나 있는 일인가? 가족과 성(性)에 대한 우리 가치관은 조선 중기 이후에 유학자들에 의해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어느 차(茶)집에 60대 법대 출신들이 모여 개정된 가족법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 자식인지도 모르게 법을 고쳐 놓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은근히 말했다. 고려사를 읽으시라고. 단성현 호적에 대한 책도 읽으시라고. 우리의 가치관이란 것은 언제나 현재를 중심으로 판단하게 된다. 통시적(通時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헛짚게 된다. 조선에 와서도 진관사는 궁중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조실록에 보면 1397년 정축(丁丑) 1월에 태조가 행차했고, 9월에도 행차해 하루를 보내고 환궁했다(幸眞寬寺 次宿西郊). 또 다음해인 1398년(태조 7년)에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죽어간 많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재를 열기도 했다(設水陸齋于眞寬寺). 지금도 진관사는 영혼들을 위로하는 수륙도량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 후 태종도 수륙재를 열었고, 세종은 이곳에 독서당을 열어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 젊은 학자를 길러 냈으니 수험생 둔 학부모들은 아들 딸 손잡고 봄나들이 한번 다녀오실 일이다.

사람들 말로 역사적으로 좋은 자리에는 좋은 기운이 깃든다고 했다. 진관사에는 40여 점이 넘는 귀중한 문화재들이 있다. 대부분의 부처상, 나한상, 보살상, 인왕상, 사자상, 제석상, 또 영산회상도, 신중도, 나한도, 산신도 등이 모두 문화재이니 다 눈여겨 볼 일이다. 그러나 필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독성각(獨聖閣). 나반존자 소조상(塑造像)은 아직도 젊음이 넘치는데 후면 독성도는 혼자 깨우치느라 너무 힘들어 파삭 늙으셨다. 나한전의 나한들은 모두 개성이 넘쳐 경쾌하고, 칠성각의 부처님은 치성광여래일 것 같은데 아주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세종이 독서당 열어 젊은 학자를 기르던 진관사 일대. 수험생 둔 학부모라면 아들 딸 손잡고 봄나들이 한번 다녀올만도…. 이 칠성각 불단 아래에선 저 작년에 아주 소중한 보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치열하게 독립정신을 살려 낸 백초월 스님이 남기신 태극기와 신문들이다. 이 분은 우리에게 거의 잊혔다가 칠성각 중수와 함께, 삼엄하던 시절에 감추어 소장했던 자료들이 나타남으로 다시 생각나게 된 분이다. 승려의 몸으로 독립자금을 모아 보내고,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정신을 고취하고, 기차에 대한독립을 외치는 글씨를 써 행동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인 분이셨다. 불행히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했는데 그 무덤도 찾지 못하였으니…. 아쉬움을 남기고 진관사를 떠난다. 공양간 옆으로 보현다실이라고 쓴 찻집이 있다. 오늘은 그냥 지나친다. 은평뉴타운 건설로 예전 고즈넉하던 진관사 길은 거의 상실 되었다. 좌측 주차장 앞 언덕에 자리한 성종의 13번째 아들 영산군 이전(寧山君 李 )의 묘역으로 올라간다. 아들 장흥군 등 4대에 걸친 영산군가의 묘역이다. 서울시 기념물 26호로 보호받고 있다.

문인석과 묘비가 있는데 묘비에는 忠僖公寧山君之墓/郡夫人慶州鄭氏 (충희공영산군지묘/군부인경주정씨부)라고 적혀 있다. 군부인(郡夫人)이란 조선왕조 종친부인에 대한 품계인데 대군의 부인은 부부인(府夫人), 군부인(郡夫人)은 군(君) 등 종친의 처에게 내린 봉작명이다. 조선왕조는 여성들의 봉작을 남편의 품계에 따라 정했는데 임금의 여자(궁인)들은 내명부에 속하여 희빈, 숙빈, 귀인, 소의, 숙의, 상궁(정5품)이 있다. 문무관의 부인들은 외명부에 속하여 정경부인, 정부인, 숙부인, 영인, 유인(종9품)이 있었다. 묘비명(墓碑銘)을 보면 이런 품계와 봉작이 적혀 있어서 저절로 역사 공부가 된다. 이야기 나온 김에 부( )란 무엇인가? 부( )는 합장(合葬)을 뜻하는 말이다. 무덤 속에는 앞에서 볼 때 남자를 좌측에 안장하고 우측에 여자를 안장한다. 그래서 흔히 부좌( 左)라는 말로 표현한다. 묘역에서 내려오니 130년 된 보호수가 길손을 배웅한다. 북한산 둘레길(마실길)을 따라 잠시 이동하면 세종의 9째 아들 화의군 이영 묘약과 영인군 이전의 어머니 숙용심 씨의 묘표(墓表)가 있다. 이 묘표는 임진란 때 도난당했다가 400 여년만에 귀국한 묘표이다. 하나고등학교 앞으로 나와 7211번 버스를 타고 연신내로 나온다. 먹자골목이 많아 풍성한 먹을거리로 한 나절 피로를 풀어 볼 일이다. 교통편 1)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3번 출구 ~ 범서쇼핑 끼고 우회전 버스정류장, 환승 버스7211 ~ 진관사 입구(하나고등학교) 하차 2)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 ~ 50m 전방 환승 버스 704번 ~ 삼천리골 입구 하차(연신내 버스보다 걷는 거리가 멀다.) 걷기 코스 버스정류장 ~ 삼천사계곡 방향 ~ 삼천사계곡 ~ 삼천사 ~ 옛 삼천사 터1 ~ 옛 삼천사 터2 ~ 다시 내려 와~ 국가시설수영장 ~ 고개 넘어 ~ 진관사 ~ 영산군 이전 묘역~ 하나고등학교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서울 근교의 문화유적지를 탐방합니다. 3~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발자취를 찾아갑니다. 이번 달 답사 계획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위원)으로 연락주십시오. ·일시 : 3/26 토요일 9:30분 ·모이는 곳 : 5호선 상일동행 명일동역 1번 출구 ·가는 곳 : 미사리 강변길~ 팔당대교~ 배알미 ·걷는 거리 : 평지 약 10km 억새, 갈대를 낀 환상의 강변길 ·준비물 : 물, 약간의 간식, 식사비(1만원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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