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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들의 수다에 어떤 공포가 숨었나?

연극 ‘이웃집 쌀통’으로 ‘일상의 공포’ 전하는 선욱현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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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5호 이우인⁄ 2011.03.28 11:14:19

“첫 공연을 나태하게 기다리고 있어요. 극단 ‘필통’의 전통은 ‘첫 공연에서 서두르지 말자’거든요.” 3월 18일 서울 대학로문화공간 [이다.]에서 개막한 연극 ‘이웃집 쌀통’의 선욱현 연출(43)은 첫 공연을 두어 시간 남겨두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여유를 부렸다. 극단들은 보통 금요일로 개막 날짜가 잡히면 그 주 월요일에 대관을 하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이 나흘밖에 없다. 그러나 ‘이웃집 쌀통’ 공연팀은 최소 일주일 전부터 대관을 해 본 공연처럼 시연회를 준비했다고 그는 말한다. “여섯 번째 정기공연 날 개막하는 셈이에요. 브로드웨이 시스템이 따로 없어요. 관람 후기를 보니 ‘열흘 정도는 공연한 배우들 같다’는 것도 있더군요(웃음).” ‘이웃집 쌀통’은 2010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주부 작가 김란이가 쓰고, 극단 ‘필통’ 선욱현 대표가 연출을 맡아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원제는 ‘그녀들만 아는 공소시효’로, 단막극인 작품이 이번에 장막극으로 변신해 대학로 무대에 올려졌다. 이야기는 아줌마들의 시끌벅적한 수다에서 출발한다. 중간 중간 관객에게 공포심을 유발하는 음향과 조명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활발한 분위기다. 하지만 버려진 쌀통에서 아기 시체의 절단된 손가락과 발이 나오고, 뒤이어 같은 통에서 1000만 원이 든 돈 봉투가 나오면서 이야기는 순식간에 공포로 변한다. “끔찍한 호러라고 생각하고 보면 편안한 공연이에요. ‘이웃집 쌀통’의 호러는 대한민국 여성들이 가진 내면의 불안의식, 익명의 도시가 갖는 공포를 의미합니다.” ‘골목길 코믹 호러’라는 장르를 표방했지만 ‘이웃집 쌀통’의 공포는 심장을 조여오거나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무시무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연을 보고난 뒤에야 공포가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하고, 그 공포가 가슴에 오래 남는다. 일상의 공포에 관심이 많은 선 연출의 의도가 많이 묻어 나오는 작품인 이유다. -단막극 제목은 ‘그녀들만 아는 공소시효’던데 왜 바꿨나? “공연을 보고 나면 이해가 되는 제목이지만 입에 외기는 쉽지 않아서다. 작가가 제일 먼저 생각해낸 ‘다정한 이웃’, 내가 좋아한 ‘옆집 아줌마’ 등 다양한 제목 후보가 있었다. ‘이웃집 쌀통’은 50여 후보 중에서 선택됐다. 이웃집(옆집)이라는 단어 자체에 친근함과 낯설음이 공존한다. 친하고 익숙한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전혀 모르는 이웃도 있지 않나.” -‘이웃집 쌀통’이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서 당선된 이유를 뭐라고 보나? “일상을 조금 다르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버려진 쌀통을 보는 모습은 일상이지만, 그 뒤부터는 탈(脫)일상, 반(反)일상으로 흐른다. 거기서 오는 재미가 심사위원을 움직였다고 본다. 도발적인 결말이 참신하지 않나. 과거 신춘문예는 문학성을 강조해 막상 공연을 올리면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7~8년 동안은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극이 주류가 됐다. ‘이웃집 쌀통’은 문학성보다 공연성이 좋은 작품이다. 공연 당시 반응도 좋아 이렇게 장막극으로 발전했다.” -일상의 공포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성인이 되어 생각한 이 세상은 상식적이지 않다. 청소년기에 배운 상식을 배반한다. 신문 구독 해지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전화를 받은 사람이 너무 친절한 거다. 그래서 당연히 배달이 끊어질 줄로 믿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신문이 배달되고, 그런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한편으론 세상이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모습을 극으로 옮기면 어떨까 싶었다. 우리 삶에는 웃지 못 할 코미디가 많다. 동전의 양면처럼 코미디도 무서울 수 있다. 어리고 키가 작은 남자가 졸졸 쫓아다닌다. 이건 코미디다. 그런데 그 사람이 4~5년을 계속 쫓아다닌다면 공포를 느낄 거다. 나는 거기에 주목했다. 1995년에 등단해 3년 동안 내가 쓴 작품을 지켜본 어느 평론가는 ‘선욱현이 바라본 세상은 뒤숭숭하다’고 평했다. 무릎을 칠 정도로 공감하는 문장이었다.” -요즘 관심을 갖는 일상의 모습은 뭔가? “최근 초고 형태로 탈고한 작품이 두 개 있다. 하나만 밝히겠다. ‘빙하기’란 제목으로 앞으로 20년 뒤 빙하기를 겪는 일가족 이야기를 그렸다. 1997년 IMF 이후 각박해진 서민의 삶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사람들의 내면은 빙하기 이상으로 춥다. 돈이 있는 사람은 지하에서 여름옷을 입고 따뜻하게 지내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언 땅에서 얇은 옷차림에 창을 들고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순록을 잡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장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의 자기 모습을 반추해보길 기대한다.” -‘이웃집 쌀통’을 두고 지나치게 시끄럽다는 지적도 있는데….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조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이 드라마가 주는 전체적인 소재가 아줌마들의 수다이기 때문이다. 조용하게 정극 템포로 가면 지루해진다. 그래서 작가에게 대사와 대사 사이의 길이도 압축해서 가자고 말했다. 여인네들의 목소리가 싫은 분은 보러 오지 않는 편이…(웃음).” -아줌마 작가·연기자들과 작업하면서 느낀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공통된 특징? 모두 여자라는 것? 하하. 농담이다. 아줌마들과 작업해 좋은 점은 예쁜 척을 안 한다는 것이다. 가장 어린 배우 김소영은 34세 처녀인데도 이 작품을 할 때만큼은 거침없이 표현하더라.” -얼마 전 ‘이웃집 쌀통’ 기자간담회 때 ‘여배우의 남편은 배우일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연출의 부인도 배우인가? “이런 이야긴 처음 하는 것 같은데, ‘이웃집 쌀통’에 출연하는 ‘순이 네’ 김곽경희가 집사람이다.” -부인과 작업하면 어떤가? “불편하다(웃음). 일단 부부가 같은 일을 동시에 하니 애기 보는 일에도 차질이 생긴다. 돌봄 선생이 와서 돌봐주긴 하지만.”

-김곽경희란 이름이 특이한데? “내가 지어준 이름이다. 본명은 김경희인데, 김경희란 이름의 배우가 대학로에도 서른 명쯤 될 거다. 흔한 이름이라 배우로서 묻힐 것 같았다. 다른 이름을 만들까 하다가 장모님 성을 넣었다.” -‘이웃집 쌀통’은 어떤 관객이 봐야 할까? “주부는 너무나 가까운 이야기라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20대들에게는 의외로 씁쓸한 코미디로 보일 것 같다. 물론 ‘생각 없이 웃고 즐길 분은 이거(‘이웃집 쌀통’) 보세요’라는 후기도 있지만(웃음). 연극의 심오한 세계관과 인류의 정신적 가치관을 보려는 사람에겐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연출이기 이전에 유명한 작가 선욱현 연출은 연출 이전에 유명한 작가다. 1995년 문화일보에서 희곡 ‘중독자들’이 당선되며 작가로 등단한 그는 이후 극단 ‘모시는 사람들’에서 다수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주로 일상의 공포를 다룬 작품을 썼다. 2007년 극단 ‘필통’을 창단해 연극인에게 창작의 기회를 주고 있다. 현재 서울연극협회 부회장으로 연극과 공연계가 나아가야할 길을 위해 부지런히 애쓰고 있다. -신인 극작가와 창작극 육성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여기까지 있게 한 데는 몇 분의 귀인이 있다. 그 중 내가 1995년에 입단해 활동했던 극단 ‘모시는 사람들’ 대표는 내가 쓴 작품 다섯 편을 공연으로 제작해 줬다. 사랑은 받은 만큼 내린다고, 나 또한 후배들을 위해서 그런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필통’의 창단 공연도 다른 작품을 올렸다. 나는 작가가 주 업무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객원 연출을 많이 모실 생각이다.” -서울연극협회 부회장으로서 공연계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뭐라고 생각하나? “이번에 서울문화재단에서 축제 예산을 1억 원 깎는 바람에 사태가 났다. 현 정부 들어서 두 가지 불만이 생겼다. 하나는 너무 일방적이다. 현장을 지키는 많은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기보다 몇몇 사람의 아이디어와 의지가 통고식으로 온다. 현장 사람들은 거기에 대항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보다 순응하고, 그러다 보면 또 정책이 바뀌곤 한다. 다른 하나는 3년째 문화예술 부분 예산이 줄고 있는 것이다. 지원금이 없어서 연극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적은 돈이 생명줄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웃집 쌀통’은 1500만 원의 정부 지원금을 받았다. 일방적 정책은 기형적인 문화예술 지형을 만든다. 국가 지원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공연계의 양상이 달라진다. 만일 공포 연극에 지원금을 많이 쓰면 대학로 일대가 공포로 바뀔지도 모른다. 지원금은 공정하고 올바르게, 다양한 장르에 나눠줘야 한다. 잘하든 못하든, 다양한 공연 예술가가 나올 수 있도록 지원 제도가 개선됐으면 한다. 지금은 심사위원이 누구냐에 따라 지원금이 바뀌고 있다.” 드라마 ‘강력반’의 인터넷 뉴스 사이트 사장 ‘쁘띠장’ KBS 드라마 ‘강력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선 연출은 극 중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남자 ‘쁘띠장’ 역할로 출연 중이다. ‘강력반’의 감초로 떠오르고 있는 배우다. -출연은 왜 했나? “작년에 ‘죽지 않아! 굿모닝 줄리엣’이라는 캐나다 원작 번역극에서 여자 교수 역할을 맡았다. 페미니즘 연극이다 보니 주인공 여자 교수를 여자가 하면 너무 옛날 톤 같다고 해서 출연 배우를 모두 남자로 바꿨다. 여장이 아니라 진짜 여자를 남자가 연기했다. 그때 ‘강력반’ 제작본부장인 프로듀서가 나를 보고 연출에게 추천했다. 처음엔 내 외모를 보고 형사 역할을 추천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연출도 내가 쁘띠장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 ‘오디션 때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고 하더라.” -쁘띠장은 원래 여성취향적인 역할이었나? “여성적인 캐릭터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캐릭터가 너무 많으니까 차별화를 주자고 감독과 상의했다. 감독이 먼저 제안한 것은 팔뚝은 통나무 같고, 머리도 큰데, 목소리는 새침하게 ‘안녕~’ 하는 남자, 전화 받을 때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남자였다. 하지만 게이는 아니다. 처음엔 이런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가발을 쓰면 편안할 정도다. 남자가 40대가 넘으면 여성 호르몬이 증가한다던데, 내 안에 여성성이 많나 보다.” -연극 안에서 쁘띠장은 인터넷 뉴스 사이트 ‘쇼킹닷컴’의 사장이다. 인터넷 뉴스 사이트 사장에 대해 평소 어떻게 생각했나. “신문방송학과(전남대학교)를 전공했지만 주로 문화예술 사이트만 접해서 딱히 (그들에게) 어떤 생각을 가져본 적은 없다. 그런데 쇼킹닷컴 사장 역할을 맡으면서 이런 사장이 있을 수 있겠단 생각은 했었다.” -극작가, 연출, 연기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이 꽤 많다. 하나에 집중할 시간에 그렇게 다양하게 활동하는 이유는 뭔가? “내 안에 본능이 많아서다. 하지만 아이덴티티는 작가다. 남이 볼 땐 정말 편하고 외향적인 성격이지만, 의외로 내성적이고 까다롭다. 지금은 희곡 선생 직업도 좋다. 2004년부터 희곡작가교육원에서 강사로 강단에 섰는데, 선배 작가로서 후배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서 좋다.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에서’에서 나오는 대사 중에 ‘왜 세상은 태어나는가. 나보다 나은 인간을 낳기 위해 인간은 존재한다’라는 것이 있다. 좋은 작품, 좋은 연기를 남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어느 작가가 태어나는 데 있어서 요만큼이라도 일조하는 선배가 될 수 있다면 보람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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