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듯 투명하면서도 방금 그림을 그려낸 듯 맑고 촉촉함이 묻어나는 수채화. 탄자니아의 대표화가 존 다 실바의 작품을 보고 느낀 첫 인상이다. 깨끗하면서도 순수한 색감으로 밝은 느낌을 듬뿍 담은 존 다 실바는 사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중풍으로 하반신도 마비가 올 정도지만 노장답게 흔들리지 않는 노련한 붓놀림으로 아름다운 거리의 표정을 세세하게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다. 마치 어제 걸었던 그 거리의 모습처럼 내일도, 1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같은 모습으로 멈춰져 생생히 남아 있을 것만 같다.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으로 직접 존 다 실바를 찾아간 아프리카미술관 윤보라 큐레이터와의 대화를 통해 그와의 생생한 만남을 들어봤다. “푸른빛의 바다와 잿빛의 건물, 공을 차는 흑인 아이들과 그 사이를 비켜가는 차도르 쓴 여인들, 부조화 속의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 골목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많은 상점들. 그런데 어느 물건을 파는 상점이던 간에 공통적으로 판매하고 있는 어떤 엽서가 있었어요. 잔지바르의 풍경을 그린 수채화였죠. 그림이 주는 오묘한 기운과 엽서치고는 상당히 비싼 가격 때문에 호기심이 일었고 한 상점에서 작가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어요. 그것을 그린 작가는 인도 태생으로 잔지바르에서 60여년을 넘게 산 탄자니아의 국민화가 존 다 실바라고 하더군요. 유럽에서는 이 작가의 친필 사인이 수록된 엽서를 100유로에 판매한다고 하니, 엽서 한 장이 한화로 15만 원 상당이었죠. 그런데 세계에서 쏟아지는 러브콜에도 작가는 무덤덤하다고 했어요. 전시 초대에 잘 응하지도 않고 잔지바르를 떠나지도 않는 외골수라는 말에 무척이나 괴짜라는 생각이 들었었죠.” 마르지 않는 열정이 전하는 행복한 그림 “예술의 혜택은 모두가 누려야” 작가를 만나기 전 그녀가 들은 이야기로 짐작컨대 그는 물질적인 욕심보다 순수한 예술의 열정이 누구보다 강하고 공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존 다 실바는 세면대에서 손을 닦고 있었고 물감이 채 닦이지 않은 손이 방금까지 작업 중이었던 노화가의 열정을 보여주는 듯 했어요.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는 듯이 놀라며 ‘오른쪽에 서 있어서 내가 못 봤군!’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가리켰어요. 회색으로 변한 초점 잃은 눈동자, 당뇨병으로 한쪽 눈은 실명됐고, 중풍으로 4번이나 쓰러져 하반신도 마비가 와 걸음걸이가 편치 않아 보였죠. 열정은 신체의 불편함도 무색케 하는구나 느꼈어요. 딸들을 시켜 집안 곳곳에 보관해 놓은 그림들을 하나하나 꺼내는데, 작품이 채 스무 점이 되지 않았죠. 왕성한 작업량에 비해 작품이 적은 이유를 물으니 완성된 작품은 전량 영국으로 보내지기 때문이라고…. 그는 전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작품을 엽서나 포스터로 만드는 것에는 상당히 호의적이었어요. 작가 자신은 고향을 떠나지 않는데 그의 작품은 엽서와 포스터로 만들어져 전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었죠. 전시를 보는 한정된 관람객이나 소수의 컬렉터뿐만이 아니라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다수와 공유하기를 바라는 듯 했어요. 그는 그렇게 자신의 그림이 일상 속에 놓여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마음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프리카 그림 같지 않은 시간 속 풍경 “다시 태어나도 난 예술가” 여느 아프리카 작가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전혀 아프리카스럽지 않은 그의 그림에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끌어당기는 그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그림은 그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드럽지만 힘이 있었고, 자유롭지만 치밀함이 보였죠.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그림이 아프리카적이지 않다는 것이에요. 자신의 열정을 원색으로 표현하며 붓 터치를 강렬하게 하는 여느 아프리카 작가와는 달리 그의 붓놀림은 정적이면서도 파스텔 톤 색채가 마음의 안정감을 느끼게 했죠.
수십여 년을 봐왔을 골목 구석구석, 잔지바르의 특징이 되어버린 다양한 형태의 문들 그리고 부인과 딸들을 데리고 소풍갔던 바닷가의 풍경은 그의 그림 속에 영원한 시간으로 남아 있는 듯 했어요. 팔기 위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신의 신념까지 파는 작가들 속에서 끝까지 소신을 잃지 않는 고집쟁이 작가가 얼마나 될까! 말없는 고집을 부린 존 다 실바는 그 고집 덕에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도 예술가의 길을 택하시겠어요?’라는 질문이 채 끝나기 전에 ‘oh yes, yes’ 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에는 어린아이의 순수함, 청년의 열정 그리고 노인의 겸손함이 어우러져 더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함을 느꼈어요.” 작품 위 손자국이 어느덧 나무로 테이블 위 물감을 만졌다가 손에 묻었다. 그것도 모른 채 그림을 집어 들었다가 작품 귀퉁이에 손자국이 남았다.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며 그는 빙그레 웃더니 그림을 가져갔다. 가져간 그림 위에 붓 터치를 몇 번 하더니 다시 나에게 건넸다. 손자국이 있던 곳에 어느새 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