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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웃는 연극이죠. 갈치조림처럼”

연극 ‘푸르른 날에’ 연출한 고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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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9-220호 이우인⁄ 2011.05.02 14:07:26

서울 남산창작센터 앞. 보슬비가 내린 뒤 흠뻑 젖은 길 위에 벚꽃이 떨어진 풍경이 처량하다. 하지만 이내 센터를 둘러싸는 우렁찬 북 소리에 귀와 가슴이 울렁거린다. 연극 ‘푸르른 날에’ 연습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 연극의 선장 고선웅 연출은 이날도 컵라면으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 나타나더니 “지금 배우 네 명이 북을 치고 있어요. 신명나죠?”라고 말하며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경진의 희곡 ‘푸르른 날에’는 차범석 연극재단과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차범석 희곡상 제3회 장막 희곡 당선작으로,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휘말린 남녀의 사랑과 인생역정을 31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돌아보는 작품이다. 약 2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5월 10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첫 무대를 갖는 ‘푸르른 날에’를 고 연출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푸르른 날에’는 심각한 이야기고, 관극하는 데 숙연해야 할 듯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관객이 관극의 경계를 넘어서 극에 동화하는 단계까지 오기를 바랍니다. 공연 분위기도 31년 전 사건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 생각이고요.” 고선웅 연출의 끝없는 ‘연극 욕심’ 고 연출은 고등학생 때부터 TV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해 연기자의 꿈을 꿨다. 하지만 당시는 연극영화과가 많지 않았다. 신문방송학과를 연극영화과와 비슷한 학과로 착각해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간 그는 스무 살 때부터 학교 공부보다 연극에 미쳤다. “스무 살 때부터 서클 생활을 치열하게 했어요. 연극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제겐 ‘연극 근육’이 있어요. 군대에서도 제가 만든 단막극으로 순회공연을 할 정도였죠. 대학 졸업 뒤 들어간 회사는 제가 연극만 한 이상한 사람이라고 잘랐지만요(웃음).” 두 번째 직장인 광고회사에서는 4년을 버텼다. 프로모션 파트에서 이벤트 플랜을 담당한 그는 이벤트도 연극으로 만드는 재주를 부렸다. 스스로도 ‘그땐 잘 나갔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안정된 직장이 그의 ‘연극 욕심’을 채워주진 못했다. 그는 1998년 과감하게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연극판에 뛰어든다. 2006년에는 플레이팩토리 마방진이라는 극단도 차렸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14년째 배고픈 연극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후회한 적은 없단다. 지난해 9월에는 경기도립극단 단장에 취임해 작품을 준비 중이다. 6월 18일부터 7월 17일까지 신촌 더스테이지에서 열리는 ‘신촌연극제 - 락희맨 쇼’ 연출도 맡는다. 그 와중에 남산예술센터와 신시컴퍼니에서 제작하는 ‘푸르른 날에’ 연출까지 맡았다. 고 연출의 연극 욕심은 끝이 없다. “지금 경기도립극단에서는 ‘늙어가는 기술(6월 공연)’과 자살을 소재로 한 ‘4번 출구’를 준비하고 있어요. 경기도립극단 선배들과 공동창작 형식을 빌려서 즉흥 형식으로 대본을 만들었는데, 서울에도 올라와서 공연할 예정입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하긴 힘들지만 그렇다고 제가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괜찮아요. 이거 연습할 때 다른 거 걱정하면 못할 텐데 저는 이거 연습할 때는 이것만 생각하거든요. 혼자 있을 때는 머리가 무진장 복잡해지지만요. 하하.” 유머 깃든 슬픈 연극 ‘푸르른 날에’ ‘푸르른 날에’는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을 세월과 다도를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제작사는 소개한다. 5.18 민주화 투쟁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역동적이고 극적인 장면도 기대할 만하다. 슬픈 소재의 이야기지만 신파극은 아니란다. “인간, 사회, 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살아 있는 대사와 가벼운 터치로 그려낼 줄 아는 특별한 입담을 지닌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이라는 평가를 받는 고 연출의 손을 거치기 때문이다. 웃으면서 우는 연극은 그가 이번 작품에서 지향하는 바다. -‘푸르른 날에’는 준비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해 12월에 낭독 공연을 하고, 올해 1월부터 프로덕션을 꾸려서 조금씩 준비했습니다.”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을 세월과 다도를 통해 보여준다는데요, 무대 위에서는 어떻게 구현되나요? “남녀의 사랑을 31년 세월을 플래시백하면서 보여줍니다. 다도를 무대 위에서 디테일하게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느낌만 표현할 생각이에요. 그림으로는 충분히 나올 거라고 봐요. 디테일의 강약을 조절하고 있죠. ‘다선일여(차와 선이 똑같다)’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 장면에서 만감이 교차할 겁니다.” -특별하게 시도하는 장면이 있습니까? “그건 연극을 봐야 알 거라고 생각해요. 연극은 짧은 시간 안에 31년 이야기를 물 흐르듯 담아냅니다. 그 안에서 세월을 느끼고 ‘인생이라는 게 이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거라고 믿습니다.”

-5.18 민주화 투쟁은 어떻게 보여줄 생각이죠? “도청을 사수하러 들어간 주인공 민호와 기준, 왕배가 총을 맞고, 민호가 항복하는 과정에서 보여줄 겁니다.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가 가진 리프팅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고요.” -출연자 대부분이 고 연출의 대표작 ‘칼로막베스’ 출연자네요? “이 공연에는 배우 20명 정도가 출연하는데요, 단기간에 외부 배우를 캐스팅하면 스케줄 조율에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그런데 (마방진) 단원들과는 ‘푸르른 날에’ 낭독 공연도 했고, ‘칼로막베스’를 6개월 넘게 함께 준비했기 때문에 (연기의) 깊이가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작업하면서 제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축구와도 같아요. 잘하는 선수들을 여기저기서 모아서 하면 경기가 무조건 잘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거든요. 결국엔 팀워크, 앙상블이 중요합니다. 우리 단원들의 팀워크는 최상입니다.” -‘푸르른 날에’는 초등학생 이상 관람가고, 중학생 이상에게는 권장하는 작품인데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어린 아이들이 봐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푸르른 날에’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하지만 결국엔 ‘인간에겐 시대의 질곡, 거대한 탁류가 있다’라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이는 중고등 학생들에게도 의미 있는 담론이 될 거예요.” -그런가 하면 어린 청소년들이 5·18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인데요? “저는 과거를 이야기하려면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재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라는 기준이 없이 과거를 재현한다면 부담스러운 강요가 되거든요. 부담스러운 소재로 관객을 계몽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또 5·18을 무대에서 재현해 봤자 다큐멘터리나 책에는 미치지 못할 거고요. 저는 작품의 무거움을 줄이지 않은 상태로 극을 끝까지 제대로 끌고 갈 생각입니다. 제가 이 작품을 하게 된 이유도 그런 모범 사례를 보여주고 싶어서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거대한 탁류 속에 청춘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헤어졌고 31년이 흘렀다. 이 모든 것은 운명적인 시대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운명적인 시대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의 이야기가 ‘푸르른 날에’의 중요 포인트입니다.” -고 연출의 작품 세계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특유의 리듬감과 재기발랄한 유머가 공존한다’는 평을 듣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이런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을까요? “사람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생각이 변해요. 얼마 전에 어떤 연극의 리허설을 보는데요, 슬픈 장면이었고 무척 슬펐는데 1분 동안인가? ‘갈치조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결론은 아무리 하나의 방향으로 몬다고 해도 관객은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거운 주제를 무거운 형식과 해법으로만 보여줄 필요는 없어요.” -‘푸르른 날에’는 386세대의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도 소개됩니다. 386세대로서 공감하는 부분을 듣고 싶습니다. “저희 때는 시국이 늘 어수선했습니다. 5·18이 났을 때 저는 경기도 가평의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고등학생 때는 광주에서 조선대 부속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데모가 일상이었고, 대학에선 87학번이었는데 최루탄 냄새 때문에 수업시간에 눈물, 콧물을 흘리고 그랬어요. ‘푸르른 날에’를 보면 70년대 말부터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을 겁니다.” -피와 땀을 투자한 연극인데요, 공연장소(남산 소재)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우려는 없나요? “그건 드라마센터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라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극장에 잘 어울리게 만들 겁니다. 스태프도 너무 훌륭하고 열심히 해주고 있고요. 무대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작업이라서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이 연극을 본 관객이 궁극적으로 가져갔으면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관객의 생각에 제가 관여할 순 없어요. 단지 바라는 건 공연을 본 뒤 감동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공감하고 울었으면 좋겠어요. 이 연극엔 슬픔은 있지만 관객을 궁지에 몰아넣진 않아요. 명랑한데 슬프달까요? 웃으면서 우는 연극, 그게 가장 원하는 겁니다. 갈치 조림처럼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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