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는 저를 돌아볼 수 있게 해준 작품이에요. 저는 엄마에게 살가운 딸이 아니거든요. 사랑한다는 말도 정말 안 하고, 엄마와 손을 잡은 기억이 없을 정도예요. 엄마가 그런 저를 보며 속상해 하시는 걸 알면서도 저는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지난해 연극 ‘엄마를 부탁해’에서 살가운 차녀를 연기했던 뮤지컬 배우 차지연(29)이 5월 5일부터 6월 19일까지 충무아트홀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무뚝뚝한 장녀 지헌을 연기한다. ‘엄마를 부탁해’는 신경숙의 장편소설로 2008년 11월 출간 이후 ‘엄마 신드롬’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170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한 베스트셀러다. 엄마(극 중 이름 박소녀)를 잃어버린 뒤 가족의 기억을 통해 여자로서 삶을 포기하고 아내이자 엄마로만 희생해온 엄마를 떠올리는 내용이다. 차지연이 맡은 장녀 지헌은 엄마와 가장 많이 닮은, 그래서 더 많이 엄마와 부딪히는 캐릭터다. 실제로도 장녀이고 홀어머니와 어린 여동생 사이에서 가장 역할을 해온 차지연의 현실과도 닮은 배역이다. 그래서 ‘엄마를 부탁해’는 차지연에게 어머니를 향해 속죄하는 반성문과도 같은 작품이란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공 2006년 일본 극단 사계의 ‘라이온킹’에서 한국 레퍼토리 멤버로 데뷔한 차지연은 ‘씨 왓 아이 워너 씨’ ‘마리아 마리아’ ‘솔로의 단계’ ‘드림 걸즈’ ‘선덕여왕’ ‘몬테크리스토’ ‘서편제’ 등 굵직한 뮤지컬에 출연하며 깊이있는 연기와 노래 실력으로 주목받아왔다. “기억에 남은 3~4살 때부터 저는 행복했던 시절이 없었어요. 어두운 블랙박스에 갇혀 산 기분이죠. 하지만 그런 기억들은 무대 위에서 아픔을 표현할 때는 많이 도움이 되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로 제 마음이 표현되나 봐요.” 차지연의 외조부는 인간문화재 박오용 고수다. 차지연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예술과 벗하며 자랐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부재는 그녀에게 큰 상처를 안겼다.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사업체가 부도난 뒤 엄마와 저, 동생을 버렸어요. 지금까지 아버지의 생사도 몰라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25년 가까이 아빠에 대한 원망이 쌓였죠. 제게 아버지는 없는 사람입니다.” 고3때 여섯 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차지연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면서 동생을 돌봤다. 추운 겨울, 옥탑방의 터진 보일러 때문에 오락실을 전전한 적도 여러 번이란다. “동생은 추워서 벌벌 떠는데 내 수중엔 170원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떨어진 지갑을 줍기 위해 오락실로 향했어요”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 당시의 추위가 전해져왔다. 차지연의 원래 꿈은 가수였다. 뮤지컬은 ‘월급을 준다’는 친구의 말에 솔깃해 우연히 시작했다. 생활비 때문에 대학교(서울예술대학 연극과)도 휴학한 그녀에게 뮤지컬 오디션은 단비 같은 제안이었다. 뮤지컬 배우로 산 지 불과 6년째이지만 국내 뮤지컬계에서는 ‘차지연을 모르면 간첩’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녀는 뮤지컬 배우로 크게 성공했다. ‘엄마를 부탁해’와 유독 아픈 엄마 “힘들 땐 하나님에게 ‘왜 나만 힘든 겁니까’ 하고 원망도 했지만 지금은 참 감사해요. 내가 뭐라고 사람들은 내게 이 많은 작품을 믿고 맡겨주고, 좋은 말을 해주는 팬도 있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저를 이토록 아끼고 응원해 주잖아요.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벅차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차지연에게 ‘엄마를 부탁해’는 특별한 작품이다. 극 중 큰 아들 형철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차지연은 엄마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차지연의 어머니는 국악 전통 집안의 천덕꾸러기 장녀이자 일찍이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 풍요로운 가정을 주지 못해 늘 자식에게 미안해하는 ‘죄인 엄마’다. 그녀의 삶은 ‘엄마를 부탁해’의 사라진 엄마 박소녀와 닮았다. “엄마는 정말 예뻐요. 키도 크고 외국 모델 같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패션 감각도 뛰어나고 모든 방면에서 부족한 게 없는 분이에요. 살림도 너무 깔끔하게 잘 하고요. 하지만 여성으로서 가장 예뻤을 나이에 단 한 번도 예쁨을 받지 못한 게 너무 가슴 아파요.” 차지연과 인터뷰하기 몇 달 전, 기자는 뮤지컬 관계자로부터 ‘차지연은 감정의 기복이 심한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말 탓에 그녀와의 인터뷰가 적지 않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차지연은 활달하고 소탈했다. 그녀와 대화하면서 그 관계자에게 차지연이 그렇게 보인 이유를 알게 됐다. 아픈 엄마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제가 산만해 보이고 조바심을 내는 이유는 엄마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 염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예요. 그래서 이 작품을 하면서 제가 그렇게 우는지도 모르겠어요. 만일 ‘엄마를 부탁해’에서처럼 우리 엄마가 사라져서 몇 개월 동안 연락이 안 된다면 저는 자살할 것 같아요.” 2막 때 지헌이 혼자 부르는 ‘지헌의 후회’는 차지연이 직접 가사를 쓴 곡이다. ‘시간이 흐른다 해도 그 마음 알 수 없겠지. 언제나 날 위해 희생해도 웃어주던 엄마’라는 가사를 읊조리며 “이 곡은 차지연의 반성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엄마를 부탁해’를 하면서 엄마에게 전화하는 횟수가 늘었다는 차지연은 “이 작품을 통해 엄마가 계실 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밥 먹었어? 알았어’ 하고 끊는 식이긴 하지만. 한 번이라도 더 ‘우리 엄마’를 부르고 싶다”면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연극보다 더 풍성해진 뮤지컬 차지연은 ‘엄마를 부탁해’의 연극과 뮤지컬에 모두 출연하는 배우다. 때문에 연극과 뮤지컬의 차이를 가장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뮤지컬은 연극계에서 유명한 구태환이 연출을, 대중가요 작곡가 김형석이 작곡을 맡았다. 연극에서 정혜선과 손숙이 연기한 엄마 박소녀의 뮤지컬 버전은 김성녀가 연기한다. 연극과 뮤지컬의 차이에 대해 차지연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음악이 주는 힘입니다. 연극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면 뮤지컬은 좀 더 굴곡이 많은 것 같아요. 또 드라마가 주는 느낌도, 에피소드도 많이 달라요. 두 작품 모두 책을 토대로 하지만 원작에 충실한 건 뮤지컬이에요. 연극은 엄마와 큰딸을 위주로 한 사건으로 흐르는데, 뮤지컬은 가족 구성원과 엄마의 관계를 두루 보여주니까 모든 캐릭터가 살아 있어서 좋아요. 누구 하나 덜 하거나 빠지지 않죠.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 현대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김성녀에 대해 차지연은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김성녀) 선생님은 선배다운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가진 분이다. 무대 위 모습이나 작품에 참여하는 모습, 우리를 대하는 모습 등 하나하나 보면서 많이 배운다. 엄마처럼 따뜻하고 품어서 말씀해주시는 모습도 너무 좋다”며 자신도 김성녀 같은 선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구태환 연출에 대해서는 ‘최고’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연출님은 제가 여태껏 만나본 연출님 중에 가장 따뜻하고 부드럽고 자상하고 이상적인 남성의 성품을 가진 분이에요. 처음 연출님을 뵀을 때 따님과 통화하는 걸 옆에서 들었는데요, ‘연출님 딸은 참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극 중 아버지와 통화하는 신이 있는데 저는 ‘아버지’란 말이 잘 안 나왔어요. 아빠, 아버지란 말을 잘 못 할 정도로 어릴 때의 상처가 굉장히 크네요.” “관객에게 의리 지키는 배우 되겠다” 생계형 뮤지컬 배우로 뮤지컬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지만, 소홀히 대한 작품은 한 편도 없다는 차지연. “잘 되던 안 되던 오디션은 최선을 다해 준비해서 치렀으니까요. 그런 저의 가능성을 봐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요. 억만금을 가진 부자도 부럽지 않을 만큼 지금의 삶에 감사합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차지연은 겸손이라는 단어가 가진 본질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드림 걸즈’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 김승우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최근에는 김승우가 주연으로 활약한 영화 ‘나는 아빠다’ VIP 시사회에도 다녀왔다. “‘드림걸즈’를 할 때 엄마가 응급수술을 받고 돌아가실 뻔했어요. 당시 제 개런티가 많은 것도 아니고, 수술비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동생이랑 치킨이나 한 마리 사먹어’라면서 제 손에 돈을 쥐어주고 가셨어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고 집에 가서 돈을 펼쳐 봤는데, 치킨이나 사먹을 푼돈이 아니더라고요. 엄마의 수술비였거든요. 오빠에겐 큰 액수가 아닐 수 있지만 제겐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었어요. 정말 펑펑 울었어요. 제게 오빠는 은인입니다.” 배우로 살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불행한 과거를 떨치고 비로소 행복해졌다는 차지연은 이제 그동안 받은 사랑을 돌려줄 때라고 다짐했다. ‘섬김’과 ‘의리’는 관객을 대하는 그녀의 진심을 전달하는 단어다. “무대 위에서 나를 낮추고 관객들을 섬길 때 저의 진심이 전달될 거라고 믿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죠. 좋은 사람이 돼야 무대 위에서 좋은 배우의 향기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몬테크리스토’를 하면서 깨달았어요. 어떤 무대에 서던지 관객들과의 의리를 지킬 겁니다.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도 관리를 잘해서 김성녀 선생님처럼 오랫동안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