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벨트가 공약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선거유세에서 충청도에서 표를 얻으려고 제가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2월 1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이하 과학벨트) 구축사업과 관련한 질문에 대답한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대선공약집에 있었던 없었던 간에 공약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공약했다면 충청도에서 표를 얻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는 점을 이실직고한 셈이다. 이 대통령의 이러한 인식이 전국을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다. 논란의 출발은 대통령의 공약 번복 때문이라는 것이 정치권의 지배적인 지적이다. 과학벨트 구축사업은 대전시 대덕연구개발특구와 충남 연기-공주의 행정중심복합도시, 충북 오창-오송단지를 하나의 광역 경제권으로 묶어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개발하는 사업으로, 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인 2007년 10월 충청권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2008년 7월 충북도 도정보고 및 ‘2008 충북발전 전략 토론회’에 참석한 자리에서도 “과학벨트는 충청권 위주로 해야 하며 관계 장관들도 같은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후 2009년 2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 제출됐고 오랜 기간 난항을 겪은 우여곡절 끝에 2010년 12월 8일 국회에서 처리됐다. 그러나 연구-산업 기반 구축 및 집적의 정도 또는 그 가능성, 우수한 정주환경의 조성 정도 또는 그 가능성, 국내외 접근 용이성, 부지 확보 용이성, 지반의 안정성 및 재해로부터의 안정성 등이 입지선정 요건으로 규정됐을 뿐 입지가 충청권으로 명시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과학벨트는 지역갈등의 소지를 이유로 결정이 차일피일 미뤄져 오다가 집권 4년차 들어 지역의 요구가 분출하면서 정국의 이슈로 급부상했다. 대선 당시 이 대통령이 지역을 특정해 충청권에 유치하기로 공약한 사안이지만 영남, 호남도 유치 경쟁에 뛰어들면서 치열한 유치 경쟁이 벌어졌고,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위원회의 결론에 따라 5월 16일 대전 대덕특구로 입지가 선정되었다. 과학벨트 입지 대전으로 확정되자 들끓는 정치권 과학벨트의 ‘대전 대덕 유치’가 확정되면서 영남 의원들은 “선거 논리에 의한 역차별”이라며 강하게 반발했고, 호남 의원들은 “호남 차별”이라고 가세하는 등 정치권 전체가 영ㆍ호남 의원들을 중심으로 들썩이고 있다. 더구나 지역 유치를 공동 추진해온 경북도(G)와 울산시(U), 대구시(D) 중심으로 한 영남권 의원들은 대다수가 한나라당 의원들이지만 시민들과 함께 “정부의 이번 결정은 원천 무효”라며 백지화를 요구하고 나서는 등 대대적인 실력 행사에 나서고 있다. 3개 시도는 성명에서 “정부의 공정한 과학벨트 입지 선정을 기다려왔으나 정치논리와 지역 이기주의에 밀려 지역 안배 차원의 나눠먹기식 결정이 이뤄졌다”며 “부적정한 평가지표와 불공정한 입지평가방식 등으로 원천무효인 결정을 수용할 수 없으며 전면 백지화를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그리고 이들 시도는 “교과부는 과학벨트 평가과정에서 드러난 객관성을 상실한 평가기준과 평가방법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하고 관련 문서를 모두 공개하라”고 주장하면서 “경북 동해안은 원전과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등 국가적 기피시설을 떠맡아 국가발전에 기여해 왔지만 더 이상의 희생을 거부한다”면서 원전 폐쇄 및 방폐장 건설 중단을 요구했다. 3개 시도는 이런 요구가 묵살될 경우 행정소송 등 법적 대응을 비롯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3개 시도 공동유치위원장인 김관용 경북지사는 지난 13일부터 닷새 동안 자신의 집무실에서 단식에 들어가기도 했다. 박맹우 울산시장은 〃정부의 과학벨트 입지 선정에 정치논리가 팽배하고 전국을 지역갈등으로 몰아넣어 매우 실망스럽다〃며 〃대구ㆍ경북과 공동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호남권에서도 민주당 소속의 광주ㆍ전남 의원들은 정부가 사실상 충청권에 준다는 방침을 이미 세우고 광주ㆍ전남 등 다른 지역은 들러리를 세운 것 아니냐는 '짜맞추기 심사' 의혹을 제기하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대통령 “과학벨트, 그물망처럼 협력해야” 과학벨트 호남 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인 민주당 김영진 의원은 5월 19일 CNB저널 기자와 만나 “광주가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지반 안정성 및 용지 조성에 대한 점수가 심사에서 축소되면서 호남 유치에 치명타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가 불공정하게 절차를 진행하면서 사전에 ‘대전 확정설’을 흘리는 등 국책사업인 과학벨트를 정치벨트화하고 정치 상품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보수대연합을 위한 포석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또한 정부가 주요 시설을 대전에 두되 일부 연구원은 향후 광주-전남에 분산 배치할 수도 있다는 ‘배려’과 관련해서도 한 전남 의원은 “정부가 오락가락 행보로 여러 기대감을 준 것이 오히려 배신감을 키운 것 같다”며 “쥐꼬리만 한 것을 주면서 과학벨트를 삼각벨트라고 생색내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광주-전남 의원들은 광주시 등과 협의, 앞으로 대응 방향과 수위를 정할 방침이지만 지역 정치권 일각에서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선정 결과를 백지화하기 위한 법적 투쟁 등도 불사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영-호남 정치권의 목소리가 의외로 강경하게 나오자 이 대통령은 발표 다음날인 5월 17일 개교40주년을 맞은 대전 카이스트를 방문한 자리에서 “21세기 융합의 시대에 과학벨트는 개방과 융합의 전초기지로서 우리나라는 물론 일류를 위해 기여하는 꿈의 벨트가 돼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 대덕과 대구ㆍ광주 연구개발특구가 그물망처럼 연결돼 협력해야 한다”고 과학벨트 선정 배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가 공약을 공약(空約)으로 날린 경우는 과학벨트 뿐 아니라 이미 세종시에 이어 LH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지방이전, 그리고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등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을 경쟁과 불신으로 들끓게 하고 있다. 특히 동남권 신공항 건설 공약을 둘러싼 대구-경북-경남과 부산 간의 갈등을 ‘백지화’라는 고육지책으로 해결했으나 영남인들끼리 치고받는 식의 싸우는 것으로 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럼 왜 이렇게 중요한 국책사업들이 집권 후반기에 한꺼번에 터지는 것일까. 한다미로 얘기하자면 이명박 정부 초-중반에는 지역갈등의 소지를 이유로 결정을 차일피일 미뤄져 오다가 집권 4년차 들어 유치를 희망하는 각 지역의 요구가 분출하면서 정국의 이슈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국책사업들이 집권 초기 일어났던 ‘수입 쇠고기 파동으로 인한 촛불시위 등으로 허공에 날려버린 전철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일부의 판단과는 달리 ‘병목현상’에 걸리면서 “올해는 대형 선거가 없어 차분하게,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기”라고 봤던 이명박 정부의 예상에 걸림돌에 걸린 것이다. 그러므로 집권 후반기의 이슈들을 잘못 처리할 경우 내년 총선과 대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현 정부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통령은 동남권 신공항은 기계적 지역 안배 등 정치적 논리를 떠나 경제성- 효율성 논리에 의거해 처리하고, 과학벨트의 경우 대선공약 때 입지였던 충청을 중심으로 해 핵심시설을 배치하되, 영-호남 등 타 지역의 과학거점을 육성하는 분산 배치 방안이 추진되는 등 철저한 원칙에 입각해 지역공약 갈등을 해결한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정치권, LH 이전 놓고도 지역갈등 예고 그리고 LH의 경우는 토지공사와 주택공사 통합의 대원칙에 맞게 전주나 진주 한곳을 선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토지와 주택 분야별로 분산해도 업무에 지장이 별로 없는 만큼 두 지역을 모두 선정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고려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이 대통령의 구상은 결국 ‘공약’을 공약으로 ‘헛된 약속’으로 날리는 꼴이 되어 온 나라를 치열한 경쟁과 불신의 장으로 만들고 말았다. 정부가 3월 30일 동남권 신공항 건설을 백지화하자 영남지역 주민들과 정치인들은 규탄과 강경투쟁을 선언하는 등 반발이 확산된게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부산시는 신공항 입지평가 결과에 대해 정치적 결정과 조작 의혹을 제기했고, 영남지역 한나라당 의원들은 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하는 등 신공항 유치를 놓고 두 편으로 갈렸던 부산과 대구-경남 등은 정부를 한목소리로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지역에 신공항을 재추진하겠다고 밝혀 신공항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갈등이 끊이질 않자 이 대통령은 4월 1일 특별 기자회견을 갖고 신공항 백지화는 국익을 고려한 결단으로 불가피했음을 국민과 정치권이 이해해줄 것을 당부하는 등 대선 공약을 뒤집어야 한다는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정면돌파를 택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한 사람 편하자고 국민에게 불편과 부담을 주고 다음 세대까지 부담을 주는 이런 사업을 해버리자고 생각하기에는…〃라며 먼저 경제성이 떨어지는 사업을 추진했을 경우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떠안아야 할 부담을 백지화 결정수용의 배경으로 들었으며, 아울러 차기 정부와 미래 세대 역시 이 같은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언급했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주장은 지난 2009년 자신의 대선공약인 세종시 원안 건설을 수정하겠다고 발표할 당시 들었던 이유와도 같았다. 더구나 정부가 5월 16일 과학벨트와 LH 통합 본사 입지를 일괄 발표하면서 이와 같이 지역 간 갈등을 유발했던 대형 국책사업들이 일단락될 것으로 전망했으나 결국 유치에 실패한 지역을 중심으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채 여야 모두 대정부 투쟁을 벌일 기세를 보이고 있어 나라 전체가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국토해양부가 5월 13일 LH의 본사를 경남 진주로 일괄 이전키로 결정한 것은 LH의 통합 취지와 경영 효율성, 분산배치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차질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된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유치경쟁을 벌였던 전주 지역에서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에 정부는 전북의 반발을 무마할 대안으로 당초 통합 전 토지공사가 전주로 이전하기로 했던 인력 숫자를 고려해 ‘국민연금공단을 전주로 옮기고 세수를 보전해 주겠다’는 고육책을 내놓았지만 거부 당했다. 이어 민주당 정동영, 정세균 최고위원과 김춘진 전북도당위원장 등 전북 출신 의원들과 김완주 전북지사, 도의원, 4대 종단 성직자 등 300여명이 16일 청와대를 항의 방문했다. 이들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LH 분산배치를 요구하며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면서 이 대통령 앞으로 보낸 공개서한에서 “전북 혁신도시에서 LH가 빠진다면 죽은 혁신도시나 다름없다”라며 “무섭게 들끓고 있는 전북의 성난 민심을 위로하고 지역균형발전의 취지를 살릴 방법은 LH 분산 배치 밖에 없다”고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구상은 결국 공약을 공약(空約)으로 허공에 날리는 꼴이 되어 온 나라를 치열한 경쟁과 불신의 장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2012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과학벨트, LH 본사이전 등 지역공약 문제가 여야 정치권 및 지방자치단체들의 최대 이슈로 부상한 상황에서 어느정도 파급효과를 가져올지 여부에 정치권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