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등 가공식품의 포장지에서 ‘권장소비자가격’ 표시가 사라졌다. 지난해 7월부터 가공식품과 대부분의 의류 품목이 추가로 시행된 ‘오픈 프라이스’ 제도 때문이다. 이로써 제조업체는 기존의 ‘권장소비자가격’을 제품에 표시하지 못하게 됐고, 가격 결정권은 유통업체가 가져갔다. 유통업체간의 자율적 가격 경쟁을 통해 소비자 물가를 잡겠다는 취지였다. 제도 시행 11개월여.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가격표시 금지 품목을 점차 줄여나가야 한다는 분석에서부터 아직 제도가 자리 잡히기 전의 과도기이므로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전망까지, 여러 측면의 대립된 의견이 오가고 있다. 한편 혼란스러운 가격 체계로 소비자들의 볼멘소리는 시행 초기부터 지금까지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대두되는 오픈 프라이스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같은 제품이라도 소매업체마다 가격을 달리 매겨, 소비자들이 다소 혼란을 겪고 있다는 부분이다. A슈퍼에서 700원에 판매되는 라면이 B슈퍼에서는 800원에 판매되는 등 판매가격의 정확한 기준이 없어,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여전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세조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오픈 프라이스 제도에서는 소매업체의 입지, 제공되는 서비스 등에 따라 제품 가격이 한정 없이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다”며 “이처럼 가격의 진폭이 클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는 제품을 구매할 때 주의를 기울여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회사원 박모(39) 씨는 “슈퍼에서 신라면 1봉지를 800원에 산 적이 있다. 그런데 며칠 뒤 같은 동네에 있는 다른 슈퍼에선 700원에 파는 걸 확인하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며 “겨우 100원 차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문제지만, 이 일 이후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살 때마다 내가 비싸게 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곤 한다”고 말했다. 또한 박씨는 “그렇다고 해서 어느 슈퍼가 더 싸게 파는지 일일이 돌아다니며 비교해볼 순 없는 노릇 아니냐”고 덧붙였다. 지난달 말부터 이달 중순까지, 제조업체들은 원자재값 상승을 이유로 내세우며 과자 출고 가격을 도미노로 인상했다. 이로 인해 소비자들의 주머니 사정은 한층 더 어려워지게 됐다. 그런 가운데 대형마트를 비롯한 소매업체로부터 오른 과자값을 직접 접한 소비자들은 유통업체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접한 출고가 인상률에 비해, 체감 인상률은 더욱 심했던 것이다. 한 대형마트는 각 제조업체의 출고가 인상 이후 크라운제과의 크라운 산도(323g)를 3180원에서 3520원으로 10.7%, 롯데제과 마가렛트(342g)는 3510원에서 4160원으로 18.5% 올렸다. 당시 제조업체가 발표한 출고가 인상률이 각각 8%와 11%였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였다. 크라운 죠리퐁 또한 이 대형마트에서 소매가가 1980원에서 2240원으로 13.1% 올라, 당초 제조업체 측에서 7% 인상한다던 말과는 많은 괴리감을 불러일으킨다. 소매점마다 다른 가격에 소비자 혼선 여전 그러나 유통업계는 대형마트가 오픈 프라이스를 통해 폭리를 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제조업체가 발표한 출고가는 대부분 인상 품목 전체의 평균가로, 가격 인상률이 조금이라도 낮아 보이도록 계산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일 제품의 출고가 인상률은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보다 높은 경우도 있다는 설명이다. 또 대형마트가 얻을 수 있는 이윤은 특정 비율 이하로 정해져 있어, 마음대로 가격을 올려 받지도 못한다고 전했다. 지식경제부 유통물류과 관계자는 “오픈 프라이스를 둘러싼 소비자들의 불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며 “현재 연구용역을 통해 다각도로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아직은 제도가 자리 잡혀 나가고 있는 과정이니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현재 제기되는 문제점만을 근거로 오픈 프라이스를 ‘실패한 제도’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오세조 교수는 “오픈 프라이스는 철저히 소비자 관점에서 봐야 하는 제도”라며 “이 제도 아래서 소매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비자가 원하는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개발할 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는 가격을 합리적으로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의 경우 이런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안착돼 있지만, 국내의 경우 아직 과도기적 시기이므로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매업체들은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히 여겨야 한다고 오 교수는 설명했다. 가격 인상 등의 변동 사항과 그 이유에 대해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면, 소비자는 해당 유통업체와 오픈 프라이스 제도에 대해 불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가공식품의 경우 이미 국내에서 오픈 프라이스 제도로 자리 잡은 화장품, 가전제품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오히려 가격 표시를 하는 편이 소비자 편의에 도움이 되는 품목도 있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엇갈린 시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오픈 프라이스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