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호 박현준⁄ 2011.06.13 13:55:38
이한성 동국대 교수 백운산장에서 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백운대를 오르는 이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이다 보니 돌길도 많이 닳았다. 사람의 발길 하나하나야 보잘것없는 건 당연하지만 이런 것들이 세월을 거치면 어느덧 모난 돌도 둥글게 만든다. 사람의 성정(性情)도 다 그런 것이겠지. 어느덧 중년을 넘어 ‘시간의 켜’가 쌓이면 둥글어지는 것이겠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위문(衛門)에 도착한다. ‘위문’ 참 생뚱맞은 이름이다. 산성문 하나하나가 다 지키기 위한 문인데 굳이 이곳만 지키겠다는 뜻이란 말인가? 본래 북한(北漢: 서울 북쪽의 지명)에 산성(山城)을 쌓고 북한산성(‘북한산+성’이 아님)이라고 산성의 성문 이름을 붙인 기록이 승려 성능의 북한지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기록돼 있다. **북한지(1745년 영조 21년) :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수문(15개) **비변사등록(1711년 숙종 37년) : 북문, 대동문, 대서문,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수문 (13개) + 중성 : 중성문, 수문, 암문 (3개) 모두 하면 (16개) 어디에도 위문은 없다. 백운봉암문이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위문이 되었다. 이 기회에 각 문의 정확한 위치와 문 이름도 전문가들의 차분한 토론을 거쳐 재검토하면 좋겠다. 이제 북한산의 정기(精氣), 백운봉으로 향한다. 언제 보아도, 어디서 보아도 너무 잘 생긴 바위다. 지난해 여름 끝자락에 이곳에 올랐던 일이 생각난다. 지리산 종주를 하고 싶다는 길동무를 위해 연습 삼아 한 북한산 종주길에 이곳에 올랐다. 한여름 내내 에어컨 병으로 콧물을 흘리고 컨디션은 엉망이어서 그냥 지나가기를 바랐건만 그는 먼저 와서 백운봉으로 오르는 길 저만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욕심낸 산행으로 불행한 일을 당했는지 헬리콥터가 온갖 돌먼지를 날리고 우리 몸도 날려 보낼 듯했다. 그렇게 오른 햇빛 쏟아지는 백운봉 정상은 변함없는 성취감을 주었다. 이곳에 오면 연전(年前) 다른 세상으로 가신 나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1930년대 10대 후반 학우들 몇몇과 함께 이곳에 오르면서 찍은 아버지의 사진도 생각난다. 어릴 적 아버지 사진을 보며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자랑스러움 가득 담아 사진 속으로 돌아가서 아들에게 설명해 주시며 그 순간만은 10대로 되돌아가시던 나의 아버지였다. 정상에 오르니 더 이상 마모되지 말라고 말뚝을 치고 보존하는 바위 바닥 글자가 있다. 삼일운동을 기념하는 정재용(鄭在鎔) 선생의 암각문이다. 선생은 1919년 기미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분이다. 마모되어서 잘 보이지 않으나 백운봉에 오르는 이는 한 번쯤 관심 가져 보시라. 직사각형 네 귀퉁이에 경천애인(敬天愛人 :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이라 적고 본문에는 그날의 일을 기록하였다. <독립선언기사 기미년 이월 십일 조선독립선언서 작성 경성부청진정 육당최남선야 경인생. 기미년 삼월일일 탑동공원 독립선언서 만세도창 해주수양산인 정재용야 병술생.> (獨立宣言記事 己未年 二月十日 朝鮮獨立宣言書 作成 京城府淸進町 六堂崔南善也 庚寅生. 己未年 三月一日 塔洞公園 獨立宣言書 萬歲導唱 海州首陽山人 鄭在鎔也 丙戌生. 기미독립선언의 일을 적음 : 기미년 2월 10일 조선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는 경성부 청진정 육당 최남선임 경인생, 기미년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 만세를 선도하여 외친 이는 해주 수양산 사람 정재용임 병술생)
북한산 최고봉에 오르니 앞으로 만경대, 옆으로 인수봉이 잡힐 듯하다. 도봉의 산줄기들, 성길 따라가는 길 끝으로 의상봉 능선이 용처럼 꿈틀댄다. 이곳 북한산 최고봉을 바라보며 이 땅의 선배들이 읊은 많은 시가 전해진다. 북한지에 기록된 고려적 오순(吳洵)의 시 한 수 읽고 길을 가자. 聳空三朶碧芙蓉(용공삼타벽부용 : 하늘로 우뚝 솟은 세 떨기 푸른 연꽃) 縹緲煙霞幾萬重(표묘연하기만중 : 아득한 연하 속에 몇만 겹이던가) 却憶當年倚樓處(각억당년의루처 : 문득 누에 오른 그때를 추억하는데) 日沈蕭寺數聲鐘(일침소사수성종 : 날저무는 절집에 댕그렁~ 종소리) 백운과 인수와 만경을 세 떨기 연꽃으로 볼 수 있었던 이 땅 선배들의 마음의 눈이 새삼 찡하다. 눈과 마음을 샤워(shower)하고 오른 길을 내려간다. 술자리에서 산타는 일을 성가셔 하는 친구들이 가끔 재미삼아 ‘내려올 산을 왜 오르느냐? 돌아올 길을 돈 버리고 시간 버리고 왜 가냐?’ 등등 농을 건다. 그럴 때면 필자도 응수한다. ‘어차피 죽을 길을 왜 왔냐?’ 사는 일, 산 오르는 일, 길 떠나는 일…. 모두 다 온 곳으로 간다는 전제 아래서 움직이는 일 아닌가? 유행가 가사 하나 만들어 볼거나? “인생은 부메랑…….” 오를 때 힘들었던 만큼 내려가는 길도 힘들다. 숨차지 않은 대신 바닥 돌부리에 걸리지 않아야 하고 반질반질 마모된 바위에서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세상 높은 곳에 있었던 사람들, 내려올 때 힘들어 하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오르기는 숨차도 내려오기는 쉬울 것 같은데 더욱 조심해야 한다. 오르다 다치면 무릎이 깨지면 그만이지만 내려오다 미끄러지면 뇌진탕 아니면 큰 골절이다. 백운산장까지 다시 내려온다. 슬그머니 욕심이 고개를 든다. 몇 년 전에는 이곳에 오면 올라오던 해루재 코스를 버리고 무당골로 내려가곤 했었다. 무당골은 산장 앞에서 바라보이는 만경대능선길을 살짝 넘어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이제는 자연보호를 위해 닫아 놓았다.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처도 있고 조그만 암자도 있었던 북한산의 숨은 골짜기였다. 언젠가 길을 열어 놓을 때까지 참자. 길이 험해서 위험하고 동물들의 안식처도 보호해야 한다. 인수암 지나고, 하루재 넘고, 도선사 주차장으로 내려온다. 수십 번은 들렸을 도선사에 잠시 들려 마애불상에게 오늘의 답사길을 보살펴 주시기를 기원한다. 도선사 앞마당으로 내려오면 계곡 위의 다리를 건너 계곡을 끼고 용암봉암문으로 오르는 산행길이 나온다. 이 길로 잠시 오르자, 시간으로 10여분, 거리로 1km 남짓의 돌계단 길에 거의 다 오를 즈음 큰 바위가 몇 개 서 있다. 산행 길에 오르는 이들은 적당히 힘들어 발밑만 보고 가는 길이다. 그러나 한 숨 여유를 가지고 서 있는 바위를 바라보면 바위 정면으로 사각형의 조그만 구멍이 파져 있고 글씨가 새겨져 있다. 金尙宮淨光花之舍利塔 同治癸酉十月 日立(김상궁 정광화지사리탑 동치 계유 시월 일입 : 김상궁 정광화의 사리탑, 동치(1875년) 계유년 10월 세움) 상궁 김씨, 불명은 정광화라는 분을 화장(다비)하고 수습한 사리를 이곳 바위에 구멍을 파고 봉안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궁인들은 살아서는 임금의 여자 또는 대궐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전문직으로 궁에서 살 수 있었으나 죽을 때는 궁에서 죽을 권리가 없었다. 따라서 나이가 먹으면 사가(私家)로 나와야 했는데 달리 돌아갈 친정이 없는 궁인들은 미리 절에 시주를 하며 마음 둘 곳을 정했다가 궁에서 물러나면 절에서 마음을 닦으며 일생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지금도 서울 주변 옛 절의 탱화를 비롯한 불물(佛物)에는 그녀들의 시주로 이루어진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아쉬운 것은 사리를 담았을 사리함이 있었을 텐데 사리공(舍利孔)만 덜렁 뚫려 있고 유골의 흔적도 사리함도 없으니 후세에 누군가가 도굴해 간 것이다. 한 사람이 살다간 흔적을 사리함을 탐해서 아무렇게나 다루었을 일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다. 김상궁님 부디 노여움 푸시고 극락왕생하옵소서.
사리탑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자연의 바위에 사리공을 파고 안치하는 장례예법은 서울 근교에 여러 곳 남아 있다. 이미 필자가 소개한 바 있고, 앞으로도 소개할 것이지만 불암산 학도암, 불암사, 삼성산 만월암, 염불암 등에도 동일한 형태의 사리공이 있다. 한 줌 삶의 흔적을 위해서는 이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자취들이다. 필자는 북한산을 잘 아는 지인들에게 이곳 김상궁 사리탑에 대해 물어 보곤 한다. 이 길을 수도 없이 다녔을 분들이니까. 그런데 의외로 그런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바로 길 옆 눈 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데도 마음이 그곳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길을 가면 조금 여유를 가지고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고, 풀과 꽃도 보고, 종교가 다르더라도 절집도 들려 보고, 당집이 있으면 기웃거려도 보고 그렇게 다녀 보자. 배낭을 진 날 만큼은 조금 헐렁하게 살아 보자. 다시 도선사 앞길로 내려온다. 철조망을 쳐 놓아 내려갈 수 없는 계곡에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린다. 행여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 소리가 제법 우렁차다. 용암봉 계곡수와 무당골 계곡수가 모여 폭포를 이루는 것이다. 이곳이 출입금지 되기 이전에는 여름이면 계곡에 탁족(濯足)하는 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이다. 어디 금세(今世)에만 그랬겠는가. 이 폭포 이름이 만경폭(萬景瀑) 또는 미륵폭(彌勒瀑)인데 아마도 만경대에서 비롯한 무당골 계곡수가 만든 폭포여서 그런 이름을 가진 듯하다. 폭포 바위에는 이곳에 와서 풍류를 즐긴 이가 새긴 각자(刻字)가 선명하다. 彌勒瀑同游 趙顯命 李周鎭 丙寅仲夏(미륵폭동류 조현명 이주진 병인중하: 미륵폭포에 함께 다녀 감, 조현명, 이주진 1746년 병인년 한 여름) 그 아래에 누군가가 다시 글자를 새겼다. 자세히 보면 이주진의 아드님이 새긴 것이다. 追贈 李溵 丁酉孟冬(추증 이은 정유맹동: 붙여 씀 이은 1777년 정유년 초겨울) 이은은 어이하여 겨울날 이곳에 와서 글자를 더 새긴 것일까? 이주진은 174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3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웠던 것일까? 대를 이은 각자를 보면서 이 땅에서 먼저 살다간 이들의 흔적이 어제인 듯 가깝게 느껴진다. 이곳 우이동 계곡은 본래 덕수 이 씨의 땅이었다 한다. 그러다가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에게 양도되고 이계 집안 3대가 이곳에 재실(齋室)을 짓고 터전으로 삼았다 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자연을 벗 삼아 살면서 자신이 사는 곳을 옛 중국 인물들의 삶에 비겨 자연에다가 이름을 붙이고 글을 남겼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조선의 선비들이 존경하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였다. 무이산 아래 살면서 아홉 골자기를 노래한 무이구곡가는 자연과 벗 삼아 사는 조선 선비들에게 성경과 같은 것이었다. 고산구곡가, 춘양구곡가, 황강구곡가, 성고구곡가, 도산십이곡, 화양구곡…. 이계 홍양호도 이곳 만경폭포를 일곡(一曲)으로 하여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면서 우이동 종점에 이르는 곳까지 구곡(九曲)으로 나누고 우이동구곡가를 남겼다. 그 손자 홍경모(洪敬謨)도 할아버지를 이어 우이구곡가를 지었다. 우이구곡의 이름과 묘사는 이계집(耳溪集)에 남아 있는데 안타깝게도 필자는 구곡의 이름이 어느 지점을 이야기하는지는 정확히 알 지 못한다. 이 골짜기를 다시 개방하는 날은 이런 일도 함께 해 주었으면 좋겠다. 골짜기를 닫아 놓아 포장도로로 내려온다. 붙임바위(부암)에는 작은 돌과 동전들이 붙어 있다. 걔네들이 붙어야 운이 좋다는 믿음이 사랑스럽다.
사실 우이(牛耳 : 쇠귀)라는 말은 도봉산 쪽으로 올라가는 능선에 서 있는 우이암에서 가져다 붙인 이름이다. ‘우이’라는 말에는 ‘천하의 패자’라는 뜻이 들어 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와 월나라가 겨룰 때 월나라 구천을 누른 오나라 부차는 황지의 모임(黃池의 會)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물인 소의 귀를 잡고 잘랐다. 패자만이 소의 귀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집우이(執牛耳), 천하의 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 우리도 우이동 골짜기를 지나며 마음 속 쇠귀를 잡아 볼이거나. 옛 지도 동국여도(東國輿圖)에는 지금의 우이동 옆 골짜기가 어언동(於焉洞)으로, 우이령은 어언동현(於焉洞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좋은 길동무와 함께라면 고개길도 어언간(於焉間)에 넘어 가고, 부여잡은 쇠귀도 어언간과 우이천에 흘러간다는 말씀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종점 옆 원석이네에 들려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이나 채워야겠다.
교통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 ~ 버스환승 109, 151번 지하철 4호선 수유역 3번 출구 ~ 중앙버스차선 버스환승(109, 120, 130, 144, 153, 170, 171) 걷기 코스 우이동종점 ~ 우이령방향 ~ 영봉방향 좌측길 ~ 용덕사(마애불)~ 육모정고개 ~ 영봉 ~ 하루재 ~ 백운산장/백운암(마애불) ~ 위문 ~ 백운대 ~ (온 길로 하산) ~ 하루재 ~ 도선사(마애불) ~ 김상궁사리탑 ~ (온 길로 하산) ~ 우이구곡 ~ 부침바위 ~ 우이동 종점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