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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 에세이]프란츠 리스트의 ‘사랑과 음악’

평론가들 혹평에도 전통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 세계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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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28호 박현준⁄ 2011.06.27 13:58:44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헝가리가 배출한 음악의 거장 리스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피아노 연주의 대가(Virtuoso)일 뿐만 아니라 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개혁자이기도 하다. 그는 바그너와 더불어 신 독일 음악(New German School) 또는 신낭만주의(New Romanticism)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베토벤이나 브람스 등이 작곡한 교향악 대신 교향시(Symphonic Poem)를 썼으며, 드뷔시와 쇤베르크 등이 작곡한 현대 음악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무조성(Atonal) 음악을 시작한 선두주자였다. 리스트가 연주자로 활동했을 때 그는 전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주자로 이름을 얻었지만 평론가들은 그의 작곡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베토벤의 전통을 고수하던 슈만과 브람스 역시 리스트의 새로운 도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리스트는 당시 대중을 사로잡았던 슈퍼스타였지만 평론가들은 전통에서 벗어나는 그의 음악은 위대한 음악이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리스트는 이러한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 결과, 그는 헝가리의 민속 음악과 집시 음악을 클래식 음악에 접목시켜 ‘헝가리 광시곡(Rhapsody)’ 같은 획기적인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1811년에 헝가리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리스트는 여섯 살 때부터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첼리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당시 리스트의 아버지를 고용했던 귀족이 리스트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비엔나로 보내준다. 음악공부를 했던 비엔나에서 그는 베토벤의 수제자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당시 모차르트의 경쟁자였던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열두 살이 되던 1823년 리스트와 그의 부모는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로 건너갔다.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이후 1831년 리스트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연주를 본 후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를 위해 리스트는 하루 10시간씩 맹연습을 시작했으며 그의 화려하고 열정적인 연주는 파리 시민, 특히 여성들을 열광시켰다. 스물두 살에는 여섯 살 연상인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부인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쇼팽의 애인인 조르주 상드(George Sand) 부인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상드는 아이들이 딸린 남작부인으로, 남장을 하고 시가를 태우며 안장도 없이 말을 타기 좋아하는 등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남녀평등주의자였다. 또한 공개적으로 여러 애인과의 만남을 거치는 등 화제를 뿌리고 다니던 소설가였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프랑스에서 절대적 왕권을 물리치고 민주적인 왕위 제도를 수립한 7월 혁명(1840)의 결과이기도 했다.

다구 부인 역시 자녀를 둔 유부녀였으며 남자 이름(Daniel Stern)으로 문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다구 부인은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젊은 리스트에게 빠져들기 시작했고 결국은 남편을 버리고 두 딸과 함께 리스트의 집으로 들어갔다. 세상은 리스트가 유부녀를 유혹한 것으로 비난했지만 사실 리스트는 다구 부인의 유혹에 넘어간 젊고 순진한 청년이었다. 그들은 비난을 피해 파리를 떠나 스위스와 이태리를 여행하였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리스트는 ‘순례의 해(Annees de Pelerinage)’를 작곡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5년 후에 막을 내렸다. 다구 부인은 음악인이 아니면서도 리스트의 작곡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작곡가에게 이보다 더 큰 상처는 없을 것이다. 다구 부인 역시 그의 소설에서 리스트를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고 묘사하였다. 같은 여성주의자였던 조르쥬 상드도 그의 소설에서 쇼팽을 평가절하 하여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상드와 다구 부인 모두 자신들이 지향하는 여성주의에 도취되어 남성인 리스트와 쇼팽을 진심으로 존경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리스트는 당시 세계 음악의 거장들(쇼팽, 베를리오즈, 슈만, 바그너)과 친구가 되었으며 리스트의 음악은 전 유럽을 열광케 하였다. 특히 여성 팬들은 연주가 끝나면 리스트의 장갑과 손수건을 뺏기 위해 난장판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리스트는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와 최고의 출연료에 도취되지 않고 작곡을 계속하였으며 문학과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글도 많이 썼다.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 리스트는 러시아에 살고 있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애인인 캐롤린 공주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문인이었으며 결혼하고 딸이 있었으나 남편과 별거하고 있었다. 리스트는 큰 재해가 있을 때마다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자선 연주를 하였는데 이때 캐롤린 공주가 거금을 기부한 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점차 사랑에 빠지고 캐롤린 공주가 러시아를 떠나 독일의 바이마르로 이사를 하면서 리스트를 초청했다. 리스트는 1848년부터 1861년까지 바이마르에 머물면서 피아노 연주를 중단하고 궁전의 음악감독이 되어 작곡에 전념하면서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 시절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가 된 뵐로우(Hans von Bulow)였는데 후일 그는 리스트의 딸 코지마(Cosima)와 결혼했다. 리스트는 바이마르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피아노 콘체르토 1번 & 2번’ ‘피아노 소나타 B 마이너(Minor)’ ‘15개의 헝가리 광시곡’ ‘12개의 교향시’ ‘사랑의 꿈’ ‘파우스트’ ‘단테 신곡(Divine Comedy)’ 등 수많은 명곡들을 남겼다. 아마도 이때가 리스트가 한 남자로서, 작곡가로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1860년 리스트와 캐롤린 공주는 결혼하려고 했으나 캐롤린 부인의 전 남편이 살아 있다는 사실과 이혼 경력 때문에 교황의 승인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수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교황의 승인을 얻었지만 이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엇갈린 해설이 나오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리스트에게 또 다른 여자가 있었던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이러한 추축에도 불구하고 리스트가 캐롤린 공주를 죽을 때까지 사랑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1866년 캐롤린 공주는 로마의 한 빌라에 자리 잡고 그곳에서 26년간 살았는데 단 하루 집을 떠난 적이 있었을 뿐, 평생 은둔생활을 했다. 리스트는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왕래하면서 음악을 작곡하고 가르치는 생활을 했다. 부다페스트에 음악원을 세우고 초대원장으로 취임했으며 종종 캐롤린 공주를 찾으며 여생을 지냈다. 리스트는 총 3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캐롤린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공주가 26년 동안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그가 쓴 편지는 후일 600쪽 분량의 책 4권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리스트는 일흔다섯이 되던 1886년에 바그너가 사망한 후 딸 코지마가 주관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캐롤린 공주는 그 다음해 세상을 떠났다. 그 둘이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왜 정신적 사랑만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종교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리스트는 뛰어난 음악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수업료도 거의 받지 않고 400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유럽에서 큰 재해가 발행할 때마다 자선 콘서트를 열어 이재민들을 도왔다. 또 베토벤의 동상 건립 기금을 마련해주는 등 덕망 높은 인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의사는 좋은 인간이 되어야 좋은 의사가 된다고 한다. 음악인 역시 좋은 인간이 되어야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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