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호 박현준⁄ 2011.07.04 13:22:02
이한성 동국대 교수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환승한 버스가 아슬아슬하게 구빗길을 돌아 남한산성 남문으로 들어 온다. 370여년 전 인조(仁祖)와 반정공신 김류 등 중신들과 1천명도 못되는 군사들이 허겁지겁 청태종의 군사를 피해 들어서던 문이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산성길을 들어서면서 내 답사길 길동무들 얼굴은 꽃처럼 화사한데 내 마음은 밝지 못하다. 버스 기사의 “종점에 다 왔으니 즐거운 나들이하시라”라는 친절한 그 한 마디에 그나마 기분이 밝아져 버스를 내린다. 여기에서 오늘의 귀착점 하남 춘궁동 선법사까지 가려면 지름길이 행궁터 지나 국청사, 서문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이 길이 인조(仁祖)대왕의 항복(降伏)길이기도 하고, 오늘은 산성의 서쪽 구역을 돌아 보고자 큰 길을 따라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방향으로 향한다. 5분여 비스듬한 인도를 따라 오르면 우측으로 마치 무슨 무덤들이 몰려 있는 것 같은 많은 비석(碑石) 서 있다. 다가가 보면 OO선정비(善政碑), OO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이런 내용들이 쓰여 있는 30 여기(基)의 비석들이다. 이 곳 광주(廣州) 지방을 다스리던 유수(留守) 겸 수어사(守禦使), 부윤(府尹), 군수(郡守) 등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으면 영세토록 못잊겠다는 것인가. 우리 땅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읍치(邑治: 목민관이 거처하던 행정중심지)에는 이런 비석들이 즐비하고 내용도 동일하다. 북한산성 대서문을 들어서 산영루터 앞에 가면 이른바 비석거리에도 이같은 비석이 도열해 있다. 떠나는 지방관에게 좋은 게 좋으니 하나 세워주는 것이다. 혹시 이 이름 기억하시는지? 동학혁명의 원인이 된 조선시대 최고의 탐관오리 조병갑(趙秉甲), 황현의 매천야록에서조차 언급한 조병갑도 선정비가 있다면 아무리 큰 마음 가지려 하여도 잘 되지 않는다. 더구나 비명(碑銘)에 이르기를 ‘군수조후병갑 청덕선정비(郡守趙侯秉甲 淸德善政碑)라니.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몰아냄)’하듯이 선정비를 대하면 진실로 선정을 베풀었을 목민관(牧民官)들께 죄송한 생각이 든다. 지화문 앞으로 올라 우향우, 좌로 성벽을 끼고 청량산(淸凉山) 방향으로 간다. 높이 483m 남한산성 최고봉이다. 그 위에는 서장대(西將臺)가 있다. 남한산성 4개의 장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총지휘부의 역할을 했기에 수어장대(守禦將臺)라 한다. 산성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다. 도중에 옛 밭터 같이 보이는 공터에 천주사(天柱寺)가 있던 절터였음을 알리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벽암 각성대사(碧巖 覺性大師)가 남한산성을 축성하면서 모두 7개의 절을 지었다. 개원사, 한흥사, 국청사, 장경사, 남단사, 동림사, 천주사, 이미 있던 옥정사, 망월사를 합쳐 9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이 절의 승려들은 승병으로서 산성방어와 산성의 보수관리 등의 역(役)도 담당하였으니 국가적으로 효율적인 관리체제였음을 알 수 있다. 북한산성에서도 聖能大師가 이와 같은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절들이 일제 강점기에 폐사되었는데 해방 후 몇몇 절은 중건하였으나 천주사를 비롯한 여러 절이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헌종 12년, 1846년 홍경모 선생이 지은 남한산성을 비롯하여 경기도 광주의 역사지리를 상술한 책)에 의하면 이 곳 천주사로부터 북장대까지 숯을 묻은 매탄처(埋炭處)가 94곳에 이르고 수량도 24,192석에 이른다고 했다. 지금도 길 위에 때때로 숯을 묻었던 흔적이 보인다. 이제 숨이 가빠질 즈음 하여 수어장대(청량산)에 도착한다. 2층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잊을 것이 없는 루’라는 뜻이 아니라 잊지 말라는 듯이다. 이럴 때 무(無)는 물(勿)이나 막(莫)처럼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인조의 치욕도, 소현세자, 봉림대군의 심양에서의 아픔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영조(英祖)의 ‘소리없는 아우성’인 것이다. 이 길을 걸으며 잊어서는 안될 일이 하나 둘이겠는가? 장대 옆 쪽으로 생뚱맞은 돌비석이 하나 서 있다. ‘리대통령 각하 행차 기념식수’ 한글로 비죽 이렇게 쓰여 있다. 그 시절 그러니까 1950년대겠지…… 각하께서 이 곳에 식수를 했으니 이 곳 책임자가 무엇인가 좀 잘 해 보려고 움직인 흔적 아니겠는지. 아서라, 하지 마라(無). 높은 자리 있을 때 아랫사람 이런 짓하면 그 날로 종아리 치시라. 후세에 똑 같은 사람 되기 싫으시다면. 그 옆으로는 매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멋진 필치로 수어서대(守禦西臺)라고 새겨 놓았다. 힘이 느껴진다. 옆에는 이 바위에 대한 설명석이 세워져 있다. 광주목 이서(李曙)수어사 산하에 이회(李晦) 장군이 있었는데 남한산성 축성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북서쪽은 각성대사가 맡아 쌓고, 동남쪽은 이회장군이 맡아 쌓았는데 서북쪽이 다 완성되도록 동남쪽은 축성이 계속 지연되었다. 나쁜 모함도 계속 들어 갔다. 일도 열심히 안 하고 공사비용도 횡령하고… 이회장군은 치죄를 당하고 이 곳 수어장대 매바위 옆에서 참수(斬首)되었다고 한다. 이 때 홀연히 매 한 마리가 나타나 바위 위에 앉았다가 흔적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가 매바위가 되었다. 한편 축성비용이 모자라서 각지로 모금활동 떠났던 장군의 두 부인 송씨, 유씨는 삼전도 송파나루에서 그 소식을 듣고 삼전도 앞 강에 빠져 죽으니 그 때가 정월 초이튿날이었다 한다. 삼전도 사람들이 ‘호국부인당’을 지어 제사를 모셨다는데 이제는 흔적도 없다. 이 후 이회장군의 무고함이 밝혀졌다. 그래, 수어장대 옆에 사당을 짓고 청량당(淸凉堂)이라 하였다. 이회 장군, 두 부인, 벽암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언제나 잠겨 있어서 갈 때마다 문(門)만 보고 오는 것이 못내 아쉽다. 360년 되었다는 보호수 향나무가 이 분들을 대신하여 우리를 맞는다. 그 푸르고 청정한 색이 절대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안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무망(無忘)하라고. 성벽을 좌로 끼고 평탄한 길을 걷다 보면 글자를 새긴 바위가 보인다. 병풍바위(屛石)이다. 안내석을 보니 정조 때에 서문 주위가 훼손되어 주민들이 보수했으므로 당시 광주부윤이었던 서명응(徐命膺)이 그것을 기리는 글을 새겼다는데 웬일인지 글씨가 모두 마멸되어 있다. 글의 내용도 마멸된 이유도 설명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계속되는 소나무숲길로 나아간다.
인조(仁祖)가 치욕의 항복길로 나선 서문(右翼門) 만난다. 눈쌓이고 삭풍 몰아쳤던 1637년 1월 3일, 실정(失政)한 임금의 마음은 얼마나 착잡했을까. (이야기가 있는 길 17참조) 오른 쪽으로 국청사가 보인다. 잠시 내려가 물 한 모금 마신다. 예부터 ‘약우물’이라 불리던 샘이니 이 몸에 약이 되리라. 이윽고 연주봉(465m) 앞에 이르고 옹성 옆으로는 암문이 있다. 이제부터 성(城)을 나서 금암산, 이성산성으로 이어지는 북능선길로 들어선다. 이성산성까지는 6km 가까이 되는 능선길인데 오늘의 답사터인 춘궁동 동사지(桐寺址)까지는 약 4km의 아름다운 능선 길이다. 길도 편하고 숲도 우거져 있고 쉼터도 마련되어 있는 길이다. 길가에는 여러 들꽃들이 길손을 맞는다. 꿩의 다리, 족두리풀, 금낭화, 줄딸기, 매화말발도리, 우리 민들레…… 삼거리 지나고, 참샘골 갈림길 지나고, 전망바위 지나고, 아카시숲 쉼터(275m) 지나 작은 고갯길 안부(3번째 철탑 지나 50m )에서 20m 살짝 오르면 오른 쪽으로 궁말(궁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난다. 숲 오솔길이다. 5~600m 지나면 철탑을 만나고 이 곳에서 200~300m 가면 가로지르는 작은 고갯길을 만난다. 여기에서 좌향좌. 숲길 끝나는 곳이 갑자기 환해지더니 넓은 초원 위에 아름다운 석탑 두 기(基)가 저녁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고려시대 절 동사(桐寺)가 있던 옛절터이다. 지금은 그 절터 한 곳에 다보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 오랜 동안 이 절터에 대한 궁금증은 동국대학교 발굴을 거쳐 동사(桐寺)라는 각자가 있는 명문기와편이 발견됨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사가 어떤 절인지는 기록이 없어 알지를 못한다. 다만 고려초 작품으로 보이는 5층석탑(보물 제12호), 3층석탑(보물 제13호)과 절마당에 남아 있는 지름 5m가 넘는 좌대, 넓고 넓은 절의 규모로 짐작만 할 뿐이다. 혹자는 백제의 옛절터에 고려 때 다시 증축한 절이 아닐까 추측도 한다. 증거가 있을 때까지는 속단은 금물이다. 절마당 감로수 한잔 마시고 온 길을 다시 돌아가 갈림길로 올라 간다. 절터 앞쪽으로 순환고속도로가 지나므로 그 곳 통로로 빠져 나오면 답사길이 빠르겠으나 답사의 묘미는 자연과 되도록 함께 하는 것이다. 내려온 길로 다시 올라 앞으로 가면 하남 충궁동 마을 안길로 이어진다.
춘궁동(春宮洞). 궁말(宮마을)의 행정동명이다. 흔히 고골이라 부르는 곳인데 고고을(古邑)이 고골이 되었다고도 하고, 고궐(古闕: 옛 대궐)이 고골이 되었다고도 한다. 궁말과 고궐 어느 하나 예사롭게 넘길 수가 없다. 백제역사로 돌아가자. 백제는 BC18년에 건국하여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680년을 존속한 나라였는데 그 기간 중 한성백제(서울 근역)시대가 493년으로 존속기간의 3/4에 해당하는 기간이 한성백제시대였다. 그런데 그 길고 긴 한성백제의 흔적은 어디로 간 것일까? 신라 1000년 경주는 어느 곳을 파도 박물관이다. 그러면 한성백제도 그 절반의 흔적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현재까지 발굴결과는 그나마 풍납토성(風納土城)이 심증이 가기는 하지만 한 나라의 도성을 구지 수해지구(水害地區)에 세운다는 것도 그렇고 규모도 강대국 백제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어제 나아가 한수 남쪽을 순관하였는데 땅이 기름져 마땅히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구안의 책을 도모할 것이다. 7월에 한산 아래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겼다’ (予昨出巡觀漢水之南 土壤膏膄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 이 지역 고골에서 땅 속에 묻혀 잃어버린 500년 백제가 찬란하게 솟아오르기를 기원해 본다. 골목길을 벗어나니 앞쪽으로 광주향교가 보인다. 향교(鄕校)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각 지역에서 교육울 담당하던 국가기관이었다. 이 곳에서 수학한 우수한 학생은 서울 성균관으로 유학을 왔다. 연속극 성균관스캔들에서 본 사람들은 이미 향교를 거친 이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향교의 위치가 읍치 서쪽 2리에 있다고 했다. (在州西二里). 중정남한지의 기록에는 ‘1703년(숙종29년) 고읍터로 이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향교자리는 예전 관아가 있던 자리인 것이다. 그러면 관아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괄의 난에 겁먹은 인조는 등극 4년 후인 1626년 광주관아를 남한산성 안으로 옮겼던 것이다. 다시 광주관아는 1917년 일제에 의해 경안으로 옮겨지고 성안에 살던 천호(千戶)가 넘던 민초들은 3.1운동 후 일제가 광나루 앞으로 강제 이주시키니 그 동네가 천호동(千戶洞)이 되었다. 향교의 우람한 은행나무를 뒤로 하고 선법사로 향한다. 동쪽 길을 걷는데 2km는 되는 것 같다. 큰 길에서 벗어나 골목길 저 끝에 선법사(善法寺)가 있다. 근래에 중건한 절이라서 라말여초(新羅末高麗初)의 흔적은 없다. 절 마당에 고려초 마애약사여래불이 먼 길 온 길손을 맞는다. 보물 981호 고려초 귀중한 마애불이다. 연화대 위에 고요히 앉아 계신다. 명문(銘文)이 쓰여 있다. 태평이년정축칠월구일 고석불재여사을 중수위금상 황제만세원(太平二年丁丑七月九日 古石佛在如賜乙 重脩爲今上 皇帝萬歲願: 태평2년 997년 정축년 7월9일 여사을에 계시는 옛석불을 금상이신 황제를 위해 중수하오니 만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필자는 이 명문을 읽은 날 너무나 기분이 좋아 “아아~ 大高麗國!”을 외쳤다. 태평(太平)은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임을 표방하고 자신의 연호를 사용하는 일)의 상징으로, 고려 5대 경종(景宗)의 연호이며 백성들이 주상을 황제라 하지 않는가. 왕건도 천수라는 연호를 썼고, 광종도 고려사를 보면 건원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씀)했으니 얼마나 당당한가. 온조왕어용샘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선법사 약수 한 잔 크게 들이키고 마애불을 더나 농협 앞으로 걸어 나온다. 잠실이나 둔촌동행 버스가 많이 다니는 곳이다.
교통편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 환승 버스 9, 52번 ~ 산성종점(종로) 하차 걷기 코스 산성종점(종로)~ 선정비터~ 청량당~ 연주봉암문~ 북능선 ~ 금암산~ 춘궁동桐寺址~ 광주향교~ 선법사(마애불)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