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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에세이]폴란드 애국적 피아노 시인 프레데릭 쇼팽

콘서트 수입의 상당 부분 폴란드 독립운동 위해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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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33-234호 박현준⁄ 2011.08.08 13:35:34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피아노의 시인’으로 알려진 쇼팽은 1810년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16살에 폴란드로 건너가 군인이 되었다가 귀족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경영했으며 취미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어머니는 영재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부유한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해 피아노를 가르쳤다. 쇼팽은 어린 시절부터 무척이나 감성적이었으며 어머니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자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816년부터 1822년까지 음대 교수한테 피아노를 배웠지만 곧 제자의 능력이 교수의 기량을 앞서게 되었으며 7살 때부터 공연을 하기 시작했는데,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천재라는 평을 들었다. 같은 해에 두 편의 ‘폴로네이즈 G단조’를 작곡했으며 11살 때에는 ‘폴로네이즈 A-flat장조’를 작곡하여 자신의 피아노 교수에게 헌정했다. 그 해, 쇼팽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1세 앞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쇼팽은 피아노의 신동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5살이던 1825년에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음악의 이론과 작곡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1829년, 쇼팽은 당시 유럽 최고의 바이올린의 대가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기도 했다. 음악원을 졸업한 후에 쇼팽은 비엔나에서 데뷔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19살에는 바르샤바에서 그의 첫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여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고 ‘연습곡(Etudes)’도 작곡하기 시작했다. 1830년 그는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 폴란드를 떠날 때 조국의 흙 한 줌을 가지고 떠났다. 이 흙은 그가 사망했을 때 시신 위에 뿌려지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는 도중 폴란드에서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들까지 나고 폭동이 무자비하게 억압당하자 쇼팽은 망명의 길을 택했다. 애국심이 강한 쇼팽은 폴란드를 돕지 않은 프랑스와 무심한 하느님까지 원망하면서 그 고뇌를 ‘스케르쵸, B Minor’와 ‘혁명 연습곡’을 작곡했다. 또한 쇼팽은 살아생전 오로지 피아노곡만을 만들었으며, 낭만주의 시대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39년간의 짧은 인생 동안 23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58편의 마주르카, 27편의 연습곡, 26편의 전주곡, 21편의 야상곡, 20편의 왈츠곡 등이 남아 있다. 1931년에 파리에 도착한 쇼팽은 살롱에서 연주를 하기 시작했는데 파리의 평론가들은 쇼팽을 극찬했으며 슈만은 “천재에게 인사를 드리세요”라는 평을 썼다. 피아노의 타력이 강하지 못했던 그는 큰 공연장보다는 작은 ‘살롱’에서의 콘서트를 선호했다. 파리의 상류계급 사회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로 솟았으며 당대 최고의 음악가인 헥토르 베를리오즈, 프란츠 리스트, 빈센조 벨리니, 펠릭스 멘델스존과 시인 하이네, 화가 들라크루아 등과 교류하게 되었다.

음악을 통해 이어진 수많은 인연 가운데 쇼팽의 인생을 뒤흔들었던 사람은 바로 조르주 상드였다. 1836년 쇼팽은 프란츠 리스트의 애인인 다구 부인의 소개로 조르주 상드를 만나게 되었다. 남작부인이었다가 이혼한 상드는 파리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문인이자 여성운동가였다. 처음 만났을 때, 쇼팽은 남장을 하고 다니는 상드를 싫어했지만 상드의 집요한 구애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1837년에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폐결핵으로 쇼팽의 건강이 나빠지자 상드는 애인보다는 간호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상드의 딸과도 문제가 생겼으며 상드가 자신의 소설에 본인은 부유한 여배우로 묘사하고 쇼팽을 건강이 나쁜 공작으로 비유한 것이 화근이 되어 1847년 두 사람은 결합한 지 10년 만에 결별하고 쇼팽은 혼자 런던과 스코틀랜드로 연주를 떠나버렸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조르주 상드와 이별한 지 2년 뒤 쇼팽은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쇼팽의 사망 원인은 오랫동안 폐결핵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08년에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쇼팽은 폐의 유전적 질환인 낭포성 섬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쇼팽은 자신이 죽으면 심장만이라도 고국에 묻어달라는 유서를 남겼으며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누이가 러시아의 국경 경비대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쇼팽의 심장을 치마 속에 숨겨서 바르샤바로 갔다. 그리하여 지금 쇼팽의 시신은 파리의 라세즈 묘지에 매장되어 있지만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파리에 있는 그의 비석에는 ‘여기 파리 하늘 아래 그대가 잠들어 있으나 그대는 영원히 조국 폴란드의 땅 위에서 잠들고 있노라’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 대성당의 미사는 일요일마다 전국으로 중계 방송되고 있으며 쇼팽과 그의 음악은 폴란드 국민의 애국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쇼팽. 그는 콘서트에서 얻은 수입의 상당 부분을 폴란드의 독립운동을 위해 기부했다. 폴란드도 한국이 그랬듯이 외국의 침략을 여러 번 받으면서 어렵게 살아남은 민족이다. 그리하여 쇼팽의 서정적이며 애절한 피아노곡들은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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