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234호 박현준⁄ 2011.08.08 13:47:39
이한성 동국대 교수 일명사터 뒤로는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다소 가파르나 5분이 못되어 능선길에 닿는다. 관악산은 요소 별로 통일된 명칭이 부족한 편이다. 사람들은 편의상 이 능선을 케이블카 능선이라고 부른다. 정상 구간에 자리 잡은 시설물을 위해 설치한 케이블카가 통과하는 능선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름은 운치가 없으나 능선길 자체는 적당히 바위를 통과해 가는 재미도 있고 좌우로 보이는 육봉능선, 용마능선도 시야를 사로 잡는다. 그 사이 남자하동천(南紫霞洞天) 계곡이나 지나온 문원폭포 계곡도 운치를 돋우며, 시야를 조금 멀리 던지면 수리산, 청계산 줄기도 준수하게 뻗어 나갔다. 곳곳에 멋진 소나무가 있는 전망바위도 여럿 있다. 30여 분 땀이 밸 만큼 오르면 현위치를 표시하는 안전표지판도 몇 개 만나고 철탑도 만나는데 여섯 번째를 알리는 철탑을 지나 잠시 발길을 옮기면 우측으로 다듬어진 샛길을 만난다. 200~300m 전방 숲속에 절지붕이 보인다. 이제 능선길을 버리고 이 길로 들어서자. 걸음 옮기기를 잠시 연주암 경내로 들어간다. 언제 와도 사람들이 많다. 관악산을 어느 코스로 올라와도 반드시 들리게 되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경기유형문화재 104호로 지정된 고려후기 3층 석탑이 있다. 절의 역사는 분명치가 않다. 연주암 연혁을 설명하는 자료에는 문무왕 17년(677년)에 연주봉 정상에 의상대(義湘臺)를 짓고 그 아래 골자기에 관악사를 지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의 연주암은 관악사(冠岳寺)가 폐사된 이후에 관악사의 후신으로 이 자리에 지은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과천현조에 관악사가 ‘관악산에 있다(在冠岳山)’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관악사는 중종25년(1530년)에는 지금의 관악사터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울러 세종~세조 연간에 시문에 능했던 문신 성간(成侃)이 관악사에 머물면서 관악산을 탐사한 유북암기(遊北岩記) 내용을 옮긴 기록이 있다. 승려의 안내로 관악산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풍광에 취했던 성간이 왜 관악 북쪽으로는 인도하지 않느냐고 푸념 섞인 부탁을 한다. 이에 관악사 승려가 북쪽은 숲이 깊고 바위가 매우 험하여(山北林益 深石益峻) 가기 어렵다고 하여도, 성간이 꼭 가 보기를 원하자 도전하게 된다. 덤불을 베어 내고 넝쿨을 잡으면서 아찔한 지경을 맞으면서도 북녘에 이르게 된다. 이에 성간은 크게 만족하여 한 마디 남긴다. 조물주가 나를 위해 펼쳐 놓은 것 아니겠는가? (造物者爲予設也?) 아마 지금의 자운암능선에서 서울대 방향을 바라보며 찬탄하였을 것이다. 그 뒤 1704년 4월 성호 이익 선생이 관악산에 오른다. 그 기록을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로 남겼는데 그 기록에는 관악사, 원각사, 영주암이 나온다. ‘관악, 원각 두 절을 지나 영주대 아래에 이르렀다. 영주암터에서 휴식하고 드디어 (영주)대에 올랐다(過冠岳圓覺二寺 至靈珠臺下 憩靈珠菴址 遂登臺).’ 이 글에서 보면 관악사는 그 때까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지금의 연주대 암자가 분명한 영주암은 빈 터만 남아 있었다. 이제 연주암을 뒤로 하고 연주대로 향한다. 오르는 길 좌로 작은 전각이 있는데 효녕각(孝寧閣)이다.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녕대군의 영정(影幀)을 모신 전각이다. 경기유형문화재 8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린 솜씨로 보아서는 조선 중후기에 불화(佛畵)를 그리는 어느 화승(畵僧)이 그린 것이리라. 전해지기를, 왕위를 셋째인 충녕(忠寧)에게 물려주기를 원했던 부왕 태종의 뜻을 헤아려 첫째 양녕(讓寧)과 둘째 효녕(孝寧)이 대궐을 떠났는데 한 때 이 곳에 머물며 궁을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후세 어느 화승이 그 때 이 곳 관악사에서 수도했다는 효녕대군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은 아닐른지?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한다. 우측 아래 골자기 방향으로 나무층계가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로는 관악사지(冠岳寺址)가 내려다 보인다. 일명사와는 달리 그 이름은 남았으니 다행한 일이다. 10분여 올라 갓을 쓴 모양이라서 관악산(冠岳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한 정상 바위에 도착한다. 저 너머로 서울의 산과 도시가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3년(1789년) 12월 조에는 정조때 충신 채제공(蔡濟恭)선생이 양녕대군과 연주대, 차일암(遮日岩)에 대해 아뢴 일이 기록되어 있다. ‘관악산 제1봉에서는 경복궁이 바라다 보입니다. 양녕대군도 필시 여기에 올라 바라 보았기에 아직도 차일을 쳤던 흔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주대(念主臺)라고 합니다(冠岳山第一峰 望見景福宮 而讓寧必於此登望 故尙有遮日之痕 世稱念主臺云矣)’ 연주대(戀主臺)는 이명(異名)이 있다. 번암 채제공선생은 67세 되던 해인 정조 10년(1786년) 관악산에 올라 등정을 마친 후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를 남겼는데 거기에서는 연주대(戀主臺)라 하였고 실록에서는 염주대라 부르고 있다. 한편 앞에 소개한 성호 이익 선생의 유관악산기에는 영주대(靈珠臺)라 하였으니 적어도 관악산 정상을 칭하는 이름은 연주대(戀主臺), 영주대(靈珠臺), 염주대(念主臺) 등이 있다.
연주대와 염주대는 양녕과 충녕이 궁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는 이도 있고, 조선 후기 홍직필(洪直弼)선생은 고려의 옛신하인 남지진 등이 고려를 그리워하며 송악을 바라 보았기에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주인(主)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이름이니 그런 해석도 있을 법 하다. 연주대에서 동쪽을 바라 보면 우면산이 보인다. 1428년, 세종 10년 5월에 관악산 불성봉(佛成峰)이 무너져 내려 절을 덮치는 바람에 5명의 승려가 압사하였다. 우면산은 관악의 끝줄기가 남태령을 넘어 간 산줄기이다. 한남정맥의 한 줄기가 백운산 청계산 인덕원 거쳐 관악산에 이르고, 관악의 한 줄기가 남태령 넘어 우면산을 만들고 말죽거리 지나 매봉과 한티고개(대치)를 만든 후 탄천으로 떨어진다. 옛 술사(術士) 중에는 우면지(牛眠地)를 높이 치는 이들이 있었다. 넉넉치 못한 어떤 이가 부친 상(喪)을 당했는데 장사지낼 자리를 정하지 못하였다. 이에 덕 높은 어떤 이가 일러 주었다. “소가 잠자는 곳에 장사지내시오.” 그리 하였더니 삼대에 걸쳐 정승이 나왔다고 한다. 우면산 그 편안한 산자락 속에 편마암이 감춰져 있는 것을 몰랐다니 아쉽고, 편히 자는 소를 깨운 것은 아닌지 그 또한 아쉬운 일이다. 멀리 도심 속에 북악(北岳)이 보이고 경복궁(景福宮)도 보인다. 서울 천도 할 때, 경복궁을 지을 때, 짓고 나서도 관악산으로 말미암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경복궁에서 바라 보면 관악산은 남쪽에 있다. 오행(五行)사상으로 보면 남방(南方)은 화국(火局)이라 술사(術士)들이 끊임없이 불에 대한 위험성을 비롯하여 풍수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관악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산정상에 홈을 파고 물단지를 묻었다고도 하고, 숭례문의 숭(崇)자(字)는 불의 형상이라서 맞불을 놓은 턱이라고도 하고, 숭례문 편액을 세로로 세워서 불기운을 막았다고도 하고,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워 불을 삼켰다고도 하고, 남대문 앞에 연못(南池)를 파서 화기를 눌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정사에는 기록된 것은 아니다. 남지(南池)에 대해서 태종실록에는 모화루(慕華樓: 세종 때 모화관으로 바뀜) 남쪽에 연못을 파게 하는데 이 못 이름이 남지였다. 지금의 서대문구 천연동 부근인데 후에 서지(西池)로 불리게 되었다. 남대문밖 남지(南池)는 후에 판듯한데 일반적으로 중종때 역신으로 몰린 김안로(金安老)의 집터에 연못을 만들었다(破家瀦宅:파가저택)는 이야기가 동국여지비고나 한경지략에 전해진다. 그러면 왜 남대문 밖 남지가 관악의 화기(火氣)를 누르려고 팠다는 설이 힘을 얻은 것일까? 아마도 19C 중반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힘을 얻은 것 같다. 그 기록에 한명회의 啓를 들어 서울천도 시에 모화관 앞과 숭례문 밖에 못을 파서 화기를 눌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광화문 앞 해태는 옛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육조거리에 사헌부를 상징하던 정의의 영물이었으니 더 이상 화기와는 관련이 없다. 육조거리를 넓히는 공사를 하면서 광화문 앞으로 옮겼을 뿐이다. 민간의 이런 이야기뿐 아니라 궁중에서도 경복궁에 대해 술사들이 문제를 제기하곤 하였다. 조선초기 이름난 풍수학도가 최양선인데 궁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실록 세조 10년 9월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최연원이 호되게 반론을 펴고 있다. 결론만 언급하면, 목멱산(남산)이 안산(案山)이 되고 천리 밖 속리산에서 뻗어온 관악(冠岳)이 조산(朝山)이 되어 빼어나다는 것이었다. 기왕 이야기 나온 김에 이중환선생의 택리지(擇里志)에서 본 관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양에 대해서 “화성산(火星山)인 관악이 받치고 있어 감여가(堪輿家: 풍수사)들은 좋지 안다고 하나 국안이 명랑하고, 깨끗하고, 엄숙하고, 한양의 인사가 막히지 않고 영리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남자다움이 없음(無雄氣)’을 한스러워 하였으니 서울 남자들이여, 사내다움만 키운다면 서울은 최고의 도시인 것이다. 아슬아슬 돌아 연주대로 간다. 한 뼘 되는 터에 부처와 16나한을 모신 응진전(應眞殿)이다. 나한을 모신 까닭은 몸과 마음 닦아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라는 뜻이리라. 입구 바위에는 감실(龕室)을 파고 마애약사여래(磨崖藥師如來)를 모셨다. 아픈 이들 이 곳에 와서 기도하면 아마도 약사여래 가피와 운동효과로 쉽게 나을 것 같다. 이제 하산길로 접어든다. 하산길은 남쪽 과천으로 가는 길과 북쪽 서울대·신림동 방향으로 가는 길이 있다. 오늘은 북쪽길을 택한다. 남쪽길을 택하면 과천향교와 자하동천(紫霞洞天) 각자(刻字)바위를 반드시 살펴 보시기를 권한다. 북쪽 하산길은 자운암 암릉길과 깔딱고개길이 있다. 자운암능선은 암벽길이 거치니 취하지 말고 깔딱고개길로 내려 가자. 수백 미터에 이르는 나무층계가 잘 가꾸어져 있다. 이 길을 오르려면 힘깨나 써야 한다. 사오십분 내려 왔을까, 제4야영장이 나타나고 연주대 2km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내려가는 길은 계곡길로 편안히 갈 수 있다. 500여m 내려 오니 연주샘을 만난다. 물맛이 좋은 샘이니 한 잔 마시고 가도록 하자. 500m여 내려 오면 계곡으로 계속 직진하는 길과 우측 산쪽 오솔길로 갈린다. 계속 계곡으로 직진하면 호수공원을 거쳐 서울대 옆 관악산 입구로 나가게 된다. 숲길로 방향을 잡는다. 길은 다시 둘로 갈라지는데 숲길을 통해 편히 내려가는 길과 암벽쪽 가까이 옆으로 가는 길이 있다. 되도록 암벽쪽 산길로 가자. 이 길이 자운암 지름길이다. 길은 한 사람 다닐 정도로 좁고 외지다. 만일에 편한 길로 내려 갔다면 서울대 공학관 앞 아스팔트길과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살짝 아스팔트 고개길을 넘으면 역시나 자운암에 도착하니 문제는 없다. 다만 좀 돌아가는 길일 뿐이다. 자운암은 태조5년(1396년)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인데 서울대가 들어서면서 학교 구내에 자리하게 되었다. 구지 여기까지 찾아 오는 신도가 없는지 잠자는 절처럼 언제나 쓸쓸하다. 근세에 세운 약사여래마애불도 누구를 기다리는지 절 마당을 내려다 보신다. 이곳에는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소혜왕후는 세조의 큰 아들 덕종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급서한 관계로 청상과부가 되었다. 다행히 아들 자을산군이 즉위하여 성종이 되자 대비(仁粹大妃)가 되었는데 과수댁이어서 그랬는지 아들 성종의 비 윤씨를 폐비케 하는데 한 몫을 하게 되었다. 성격이 강직하다 해야 할까, 까칠하다 해야 할까, 좋게 보면 여자들을 바르게 가르치는 책이고 나쁘게 보면 여자들을 잡는 책인 내훈(內訓)을 짓기도 하였다. 성종 서거 후, 연산군이 즉위하자 어머니 폐비 윤씨 문제로 손자와 심히 대립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어느날 자운암에 갔을 때, 절살림을 맡은 것처럼 보이는 보살이 계시길래 넌지시 인수대비 위폐 이야기를 꺼내며 한 번 친견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한마디로 거절하는 품이 인수대비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목탁을 베고 졸고 있는 사미상을 보며 마음 달래고 자운암을 떠난다. 서울대 신공학관 앞은 버스종점이다. 낙성대로 가는 버스, 서울대입구역으로 가는 버스들이 많다.
오늘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영조, 헌종 간에 활동한 자하 신위(紫霞 申緯)선생의 흔적을 찾아 보고자 한다. 이 곳은 자하선생의 선영이 있던 곳인데 관악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부득이 옮기게 되었고, 골프장 자리에 서울대학교가 들어서면서 잊혀졌던 자하선생의 흔적을 살리고 있다. 창강 김택영 선생이 언급했듯이 자하선생은 詩書畵 삼절로 ‘조선 500년 제일의 대가’였다. 또한 다산, 혜장, 초의, 추사와 더불어 조선의 차인(茶人)으로서도 빠질 수 없는 분이었다. 이 분을 기려 서울대에는 자하연이라는 연못을 두었고 본부 옆에 동상도 세웠다. 또 등산로 호수공원에는 자하정도 세우고 자하흉상도 세웠으니 이 곳 북자하동천(北紫霞洞天)은 신위선생의 흔적이 생생히 살아난 곳이다. 대가답게 경수당집에는 4000여수의 시를 남겼는데 언제 읽어도 맛깔진 시 한 수로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澹掃蛾眉白苧衫(담소아미백저삼: 흰모시적삼입고 산뜻한 눈썹에) 訴衷情話燕呢喃(소충정화연니남: 마음 속 정다운 말 소곤소곤 얘기하네) 佳人莫問郎年幾(가인막문낭년기: 그대여 내 나이 묻지 마시게) 五十年前二十三(오십년전이십삼: 오십년전엔 스물셋이었다오) 교통편 지하철 4호선 과천 정부청사역 6번 출구 걷기 코스 청사역6번 출구 ~ 수자원공사·과천중앙고 길로 우회전 ~ 좌측 보광사 ~ 우측 기술표준원 휀스길(백운사표지판) ~ 오비구 마애석 ~ 마애 할미상 ~ 마당바위 ~ 일명사터 ~ 케블카능선~ 연주암~ 연주대 ~ 깔닥고개 ~ 연주샘 ~ 자운암 ~ 서울대공학관 ~ 2호선 낙성대역·서울대입구역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