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이종구 음악에세이]보헤미아의 자랑 ‘드보르작’

음악을 통해 체코의 민족적 자부심을 일깨우는데 일조

  •  

cnbnews 제235호 박현준⁄ 2011.08.16 11:24:38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보헤미아의 전통음악을 지켜낸 스메타나의 바통을 이어받은 작곡가는 안토닌 드보르작(Dvorak)이다. 그 역시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어 체코인들에게 긍지와 애국심을 심어준 사람이다. 1969년 미국의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할 때 그는 드보르작의 ‘심포니 9번’을 듣고 있었다. 곧 드보르작의 작품은 우주에 전달된 최초의 음악으로 기록된 것이다. 드보르작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던 프라하 근처의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정육점과 여관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지터(Zither)를 연주하며 지냈다. 드보르작은 아홉 살 때 프라하의 유일한 음악(오르간) 학교에 입학했는데, 수업은 독일어로 이루어져 독일어가 서툴렀던 드보르작은 학창시절 내내 고생하였다. 마치 필자가 일제 치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 집에서는 우리말을 하고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1866년 드보르작은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에 재능을 보여 스메타나가 지휘하는 보헤미아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었다. 하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피아노를 가르쳐야 했으며 1871년에는 작곡을 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떠났다. 드보르작은 한 제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결국 그녀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백작과 결혼을 해버리자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가곡 ‘사이프러스 나무(Cypress trees)’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다 1873년에는 첫 애인의 여동생과 결혼해 여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1877년에 드보르작은 프라하의 한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브람스의 추천으로 비엔나의 ‘짐록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보헤미아의 민속 음악을 주제로 ‘슬라브 무곡(Slavonic Dances)’을 출판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나 독일이 아닌 영국에서 먼저 유명해졌다. 독일 음악계가 보헤미아 사람인 드보르작을 차별대우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본 마리아의 고통을 표현한 ‘슬픈 성모(Stabat Mater)’는 영국에서 대성공을 이루었으며 그는 영국으로 아홉 번이나 초대받아 큰 환영을 받으며 자신의 작품을 지휘했다. 그의 ‘심포니 7번’도 영국에서 위탁받아 초연하였으며 1891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여식에서 총장은 라틴어로 드보르작을 소개하였는데 라틴어를 배우지 못한 시골 출신의 드보르작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일화도 전해져온다. 그 수여식에서 드보르작은 뉴욕 국민음악원장을 만났으며 그녀는 드보르작을 원장을 초빙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892년에서 1895년까지 음악원장으로 지내면서 미국의 흑인 음악 작곡가들을 만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심포니 9번 신세계로부터’를 작곡했는데, 1893년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초연되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그는 ‘현악 4중주 E flat’과 ‘첼로 콘체르토 B minor’도 작곡하였다. 드보르작이 영국과 미국에서 크게 성공하자 오스트리아에서도 유명해지기 시작하였으며 프라하로 돌아와 1901년부터 1904년 사망할 때까지 프라하 음악원장을 지냈다. 아마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음악계는 체코 출신의 드보르작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인이 되자 그를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예순셋에 세상을 떠난 드보르작은 총 115개의 작품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으로는 ‘심포니 9번’ ‘첼로 콘체르토 OP 104’ ‘슬라브 무곡 OP 46’ ‘현악 4중주 OP 96’ ‘바이올린 소나타 OP 100’과 피아노를 위한 ‘유머레스크 OP 101’ 등을 들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명곡들이다. ‘심포니 9번’ 등 115개의 작품을 남긴 드보르작은 보헤미아인임을 잊지 않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드보르작은 평생 자신이 보헤미아인임을 잊지 않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고 한다. 독일 출판사가 더 많은 악보를 팔기 위해 그의 이름을 독일어로 표시하려 했지만 이를 적극 반대했으며 자신의 이름을 보헤미아어로 표기했다. 체코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의 속국이 된 지 400년 후인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을 이루었다. 스메타나와 드보르작 같은 음악인들은 음악을 통해 체코 민족의 문화와 자부심을 지켜주는 데 일조를 하면서 체코의 독립에 기여한 것이다. 그러나 이도 오래가지 못하고 히틀러에게 점령을 당하고 패전하자 다시 소련군의 점령으로 인해 1948년 공산당이 집권해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었다. 소련 공산당의 지배를 받던 시절,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쿠베리크(Kubelik)는 서방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음악 활동을 통해 체코의 민족적 자부심을 살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