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故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이 말은 지난 6월 14일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펴낸 ‘문재인의 운명’이라는 제목의 자서전 마지막 구절이다. 이 구절이 야권 안팎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문재인 대망론(大望論)'과 맞물려 그의 정치적 행보에 다시 한번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실제로 최근 대선후보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야권의 차기 대선주자군 중에서 4·27 재보선까지 줄곧 야권 후보 1위였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대신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문 이사장의 지지세가 확산되면서 양강 구도로 재편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만 손 대표와 문 이사장의 지지율이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손 대표 지지율은 4·27 분당 재보선 승리를 계기로 10% 중반까지 치솟은 이후 다시 한 자릿수로 내려온 뒤 답보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야권통합을 매개로 사실상 정치행보에 들어간 문 이사장은 일부 여론조사에서 야권 후보 중 1위를 차지하는 등 빠른 속도로 지지세를 넓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전문업체인 리얼미터가 8월 1~5일 전국 19세 이상 남녀 3천7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문 이사장의 지지율은 9.8%로 손 대표(9.4%)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7월 뉴시스와 여론조사기관인 모노리서치가 공동으로 '차기 대권주자 지지도'에서도 문 이사장이 11.8%로 37.9%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이어 2위에 오른 바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여야 정치권이 문 이사장의 행보에 적지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야권대통합만이 확실한 대선 승리방안” 특히 문 이사장은 현재 거론되는 여야 대선 주자 가운데 유일한 부산·경남(PK) 출신이라는 점 또한 강점으로 꼽히고 있다. 따라서 야권 주요 인사들 가운데서도 문 이사장의 역할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도 나오고 있다. 손 대표는 “문 이사장이 빨리 민주당에 들어와 내년 총선에서 PK 지역의 야권 승리를 위한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더 큰 민주당을 만드는 데 기여해줬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정세균 최고위원도 “정권교체를 위해 5~7명의 유력 대선주자들이 나와 경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문 이사장이 대선후보군에 합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 대표는 “누구든 진보개혁 진영에서 국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많이 받는 분들이 많이 생길수록 좋다. 굉장히 기쁘게 생각하고 더 많이 올라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처럼 문 이사장의 지지도는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다. 더구나 자서전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본인은 침묵하는데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지지도는 자꾸 오른다. 오죽하면 7월 26일 국회에서 열렸던 야권연합 원탁회의에 참석할 당시 문 이사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에 발을 들여놓은 게 몇 년 만인지가 관심사가 될 정도였다.
이와 같은 현상만 놓고 보자면 여권의 ‘압도적 대세’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못지않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류에 민감한 주식시장에서는 벌써부터 문재인 관련주(테마주)가 호사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현재 실질적인 야권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손 대표를 뛰어넘어 ‘박근혜 대세론’에 맞설 대항마가 될 것이라는 대망론의 출처이자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의 운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자서전은 두 달여 만에 20만 부 이상이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종합 집계에서도 베스트셀러로서 시쳇말로 대박이다. 정치인 책이, 그것도 자서전 형식의 책이 일반인에게 이 정도로 열렬한 호응을 받은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문 이사장의 책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의 인간적 매력이 일반인에게 충분히 상품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면 문 이사장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해석이 대두되고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되고 있다. 우선 문 이사장이 갖는 ‘신사다워 보인다’ ‘가볍지 않고 강직해 보인다’ ‘쉽게 말을 바꾸거나 태도를 바꿀 것 같지 않다’ 등으로 요약되는 이미지의 장점이다.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권 출신에 특전사 제대, 그리고 인권변호사이자 노 전 대통령의 평생 동지로 살아온 삶의 궤적이 유권자에게 묘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그동안 야권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는 손학규, 유시민, 정동영, 정세균 같은 현역 정치인과 대비되는 측면이 많다. 그리고 또 다른 지지율 상승 비결은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 소위 말하는 진보개혁 성향의 야권이 현 정부 실정에 염증을 느끼는 유권자를 충분히 품어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야권의 지리멸렬함에 대한 반대급부라고 할 수 있다. 즉 ‘손학규도 아니고, 유시민도 아닌 것 같다’고 실망한 개혁적 성향의 유권자들이 새로운 대안으로 문 이사장에게 범야권이 통합하고 단일 후보를 만들어갈 때 함께 선수로 뛰어주길 바라는 기대감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자서전 인기 이유는 그리움과 호기심 때문” 그러나 정작 본인은 대선 출마 여부와 관련해 “개인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는 대답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말을 아끼는 등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ND 자세를 견지해 왔다. 더구나 시민사회 인사들로 구성된 야권연합 원탁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대선 출마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의에 “오늘은 말을 안할 것”이라고 했다가 “2012년 승리를 위해서 범야권 통합이 가장 확실하고 실효성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하며 원탁회의를 통해 통합논의를 해나갈 것”이라며 본인의 정치적 목적이 ‘야권통합’에 있음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이어 문 이사장은 자신의 역할을 놓고는 “특별한 역할이 있는 게 아니라 원탁회의 멤버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라며 “내 주장을 해 나갈 것이고 생각이 다른 분들과 뜻을 함께 모으는 작업을 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최근 지지율 상승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만 했고, 대선 출마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갈게요”라며 답변을 외면한 채 자리를 뜨기도 했다. 야권 주변에서는 이러한 문 이사장이 흩어진 친노 진영 등 야권의 여러 그룹들을 묶는 매개체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와 관련 문 이사장은 8월 11일 오후 CNB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영남, 그중에서도 부산과 울산, 경남지역에서 야당의 약진이 내년 대선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며 “전국 차원의 연대와 통합이 되지 않는다면 이 지역차원에서만이라도 연대를 위해 역할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문 이사장은 “국민 여망이 도도하고 크기 때문에 누구도 거부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며 “각 정당도 현실적으로 이를 외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우리 같은 사람이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것”이라고 되풀이했다. 그리고 문 이사장은 자서전 ‘운명’의 인기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과 아직 남아있는 영향력, 그리고 최근 정치적으로 언론의 관심을 받는 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며 “최근 지지도 상승은 대선 후보감으로 다뤄지면서 조사대상에 포함됐기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당황이 되지만 그만큼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이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문 이사장은 “유시민 대표의 지지도를 잠식한 것 같아 불편하다”면서 “그러나 유 대표의 지지도는 곧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문 이사장은 자신의 지지율 상승 이유에 대해 “아직 현실 정치에 뛰어들지 않아 상처받지 않았기 때문”이며 “정치를 뛰어들었다가 금방 상처받으면 저도 별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이사장은 “참여정부 이후 정치에서 멀어지기 위해 시골로 내려갔는데 현재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안된다”면서도 “최대치가 직접 선수로 뛰라는 요구지만 지금은 야권의 통합과 연대를 통해 한나라당과 1대 1 구도를 만드는 데 집중할 때”라고 주장했다. 문 이사장의 이 같은 답변을 미뤄볼 때 내년 총선에 이어 대선에 뛰어들지는 아직 불투명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문 이사장이 자신의 바람대로 야권 후보 단일화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데 그칠지, 아니면 스스로 단일후보가 될지는 아직까지는 더 먼 얘기지만 현시점에서는 ‘문재인식 정치마케팅’은 눈여겨볼 만하다는 지적이다. 문 이사장은 “내년에 정권교체를 이뤄야 한다는 과제에 공감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힘을 보태려 한다. 여당과 일대일 대결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면서도 “나는 정치를 직업으로 할 경우의 어려움을 이겨낼 자신감과 배짱, 결기가 없다”고 했다. 즉 정권교체를 위해선 헌신하겠지만 자신이 그 주역이 되려는 욕심은 없다는 뜻이다. 문재인 “직업을 정치로 바꾸는 것 아직은 생각 안해” 이러한 문 이사장을 보다보면 2002년 대선 당시 초반 상종가를 치다가 점점 잊혀져 갔던 고건 전 총리를 떠오르는 사람이 적지않다. 그만큼 여의도 정치판이 권력의지가 없으면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지만 고 전 총리와 문 이사장에게는 큰 차이점이 있다. 역대 정부 내내 승승장구했던 고 전 총리에겐 권력의지뿐 아니라 정권을 재창출한다거나 정권교체를 한다는 사명감이 부족했던 반면 문 이사장은 이명박 정권 교체를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고 있으며, 특히 고 전 총리가 갖지 못했던 ‘친노 그룹’이라는 지원세력이 배경으로 포진하고 하고 있다는 강점도 있다. 물론 문 이사장은 “직업을 정치로 바꿔 나서는 것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이미 자신의 스타일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최근 잇따라 가진 언론 인터뷰 내용이나 자서전을 보면 언뜻 ‘프로 정치인’의 감각이 느껴지기도 한다는 분석도 뒤따르고 있다. 더구나 ‘무욕(無欲)의 정치’와 사회운동의 경계선을 걷는 듯한 행동이 유권자들에게 신선감이나 신비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이 같은 처신은 자칫 지금은 자신의 ‘밑천’을 솔직하게 드러내놓지 않는 대신 판세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경우에 한해 ‘속마음’을 드러내 내놓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단점이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야권 일각에서는 문 이사장이 현실 정치인으로서 대중적 평가와 검증을 받지 못한 점은 물론 대선후보로서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 또는 장관 등을 거치지 못한 현실 정치경험 부재라는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야권통합에 목소리를 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친노 그룹의 한 핵심 인사는 “문 이사장이 파괴력을 지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현실 정치에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느냐가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문 이사장도 “우리 정치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정치세계에서 내공을 쌓은 분이 (대선후보) 반열에 오르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치 안하겠다는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거듭 밝혔다. 그러면서 문 이사장은 자서전에서 밝힌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숙제’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이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풍토를 만드는데 여생을 바치고 싶다고 했다”며 “그것이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문 이사장의 이런 대응에 대해 정치적인 시각에서는 고도의 전략이라고 분석하는 전문가들도 적지않다. 한 여론업체 전문가는 문 이사장의 이런 태도에 대해 “고도의 전략인 것 같다.”면서 “지금의 추세로 볼 때 야권후보가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맞서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을 알고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것 같다.”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권 안팎에서는 문 이사장이 야권 통합 과정에서 역할을 한 뒤 내년 총선 부산ㆍ경남지역에서 직접 출마하거나 후보들의 선거를 지원하는 등 ‘문재인 바람’을 일으킬 경우 ‘대망론’도 한층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 한 재선 의원은 “문 이사장은 야권의 또 다른 제3후보인 김두관 경남지사에게 부족한 엘리트 이미지가 있다”며 “대선에 나가면 인물을 따지는 보수ㆍ중도층에 크게 어필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다른 재선 의원은 “경상도 출신, 신뢰와 원칙의 이미지 등 여러모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오버랩된다”며 “따라서 ‘박근혜 대세론’을 깰 만한 사람은 문 이사장 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문 이사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잘 실현할 후보라는 친노 진영의 기대에다 기존 정치와 다른 것을 보여줄 것이라는 새로움 때문에 관심을 받고 있다”며 “문 이사장의 지지율을 거품이라고 보긴 어렵고 본인이 잘 키워나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문 이사장이 자서진 마지막에 쓴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든 ‘숙제’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