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져 가는 역사적 장소와 공간들을 방문하고 그곳의 이야기와 흔적들을 밖으로 드러내고 기록하는 이색전시가 9월 21일부터 10월 14일까지 대안공간 충정각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사진과 드로잉 그리고 설치 작품을 통해 우리 주변을 기억하고자 하는 데 있다. 혁명과 예술의 도시 파리, 두 세기가 혼재하는 런던,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너무나 미국적인 시카고. 이름만 들어도 풍경사진과도 같은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처럼 역사적 도시의 정체성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를 가지는 ‘역사적 경관’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표출된다. 사실 현대 도시에서 지역 전체의 지배적인 물질적 조건과 그에 따른 생활양식은 타 지역과 별다른 차이 없이 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나열했던 도시들처럼 ‘역사’가 도시 경관에 드러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사’라는 의미에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이라는 의미와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이라는 뜻이 있다. 두 의미를 정확히 나눌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사물의 흔적이 곧 사회의 변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 흔적이 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혹은 살았던 주변 공간의 의미는 더욱 중요해지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자. 과거부터 우리 삶 속에서 함께 하던 대장간이나 목욕탕, 선술집 등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며 사랑받는 곳이 얼마나 되는지. 현재 서울 곳곳은 재개발로 역사와 추억의 장소들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경의선 수색역 근처의 ‘형제대장간’이 올 여름을 마지막으로 철거될 운명에 처해있는가 하면, 아현동 골목의 50년 된 목욕탕인 ‘행화탕’이 재개발로 이미 내부 철거 공사중이며, 종로 청진동 ‘피맛골’의 맛집들도 대부분 옆의 오피스 건물로 이전했다. 최근 ‘뉴타운’ 혹은 ‘균형 발전 촉진지구’라는 이름으로 재개발이 진행 중인 곳이 35군데나 된다. 다행히 없어지기 전에 이에 대해 기록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밖에 많은 급변하는 도시공간에 대한 아쉬움이 사라지진 않는다. 이번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만나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근대화와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져 가는 역사적 장소와 공간들을 방문하고 그곳의 이야기와 흔적들을 밖으로 드러내고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프로젝트가 바로 ‘근대의 숲, 충정로를 거닐다!’이다. 2010년 개발계획이 확정된 충정로. 아직 개발 준비 중이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이곳은 우리의 지나간 시간이 묻어나는 곳이다. 왕복 8차선으로 광화문에서 신촌 및 마포 방향을 잇는 간선도로를 지칭하는 충정로는 1984년 10월 1일 8·15광복 전의 일본식 도로명이었던 죽첨정(竹添町) 대신 조선 말기의 충신 민영환(閔泳煥)의 시호를 본따 현재의 도로명이 되었다. 현재 많은 빌딩들로 대로변이 장식되어 있지만, 그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대의 문화와 추억의 장소가 함께 있는 흑백필름과 같은 동네이다.
충정로 대로변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충정아파트’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이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져 도요다아파트로 불리기도 하여 한국 아파트 역사에서는 소외되기도 하지만 집합주택의 형태를 보이면서 아파트가 자리잡게 된 1930년대에 지어진 예전 주거형태의 소산이다.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이 1,508평으로 건립당시에 허허벌판 속 이 건물은 반도호텔과 함께 대표적인 건물로 손꼽혔을 만하다. 지금은 옆의 고층 빌딩들에 묻혀 있어 눈에 띄지 않으니 8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건물인 ‘약현성당’도 충정로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1892년 프랑스인 신부 코스트가 설계, 감독하여 지어진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건축이라는 점과 순수한 고딕양식은 아니지만 벽돌로 된 고딕성당이라는 점에서 이후 한국 교회건축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천주교 박해시대에 수많은 순교자를 낸 서소문 밖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여 한국 천주교사와 건축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충정로의 고층 빌딩 뒤 숨겨진 ‘형제 우물길’도 빼 놓을 수 없다. 바로 옆, 높은 빌딩들과 대조되는 이곳은 옛날 시골길 모습 그대로이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몇몇 집들이 묶이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하는 식으로 작은 골목이 얽혀 있다. ‘삼거리 슈퍼’를 중심으로 방사형의 모양을 하고 높은 지대와 낮은 지대가 섞여 있는 이곳에는 지금 스파게티집과 국밥집이 아기자기하게 혼재하고 있다.
또한, 이 골목 안에는 그 유명한 ‘이명래 고약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명래 고약집’은 1906년에 생겨 50년대 이후 7,80년대까지 모든 종기에 완전하게 잘 들었던 그 유명한 이명래 고약을 만들던 곳이다. 오래된 플라스틱 간판이 허술하게 걸려있고 정자체로 ‘명래 한의원’이라 쓰여 있던 나무 현판이 걸려 있던 이곳은 2011년 6월, 번쩍번쩍하고 커다란 새 간판이 내걸린 호프집으로 바뀌었다. 이 밖에도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기찻길과 1959년 김중업 선생이 한국의 얼을 담아 표현한 주한 프랑스 대사관, 옛 문화방송국 건물인 정동 이벤트 홀, 대로변을 경관으로 만드는 새문안 길과 동화빌딩, 그리고 궁본약방에서 시작하여 70년 가까이 된 종근당, 그 밖의 많은 역사들이 이곳 충정로에 숨쉬고 있다. 이렇게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만나다’프로젝트 그 첫 번째, ‘근대의 숲, 충정로를 거닐다!’를 통해 충정로를 먼저 만나보았지만 서울 곳곳에 숨어있는 다른 역사들 역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프로젝트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앞으로 매해 서울의 다른 지역과 장소를 찾아 다양한 작가들과 함께 그 곳을 드러내고 추억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도로서 600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이 조금이라도 더 ‘역사경관’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들의 시민의식에도 ‘역사성’에 관한 생각이 더욱 스며들기를 기대해본다. 문의 02-363-2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