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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27]바위에 예술혼 담은 사람들

학도암~불암산성~천보암~불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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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39-240호 박현준⁄ 2011.10.12 14:30:55

지하철 4호선이 상계역에 도착한다. 오늘은 불암산 남쪽 줄기를 넘는 날이다. 1번 출구를 찾아 나선다. 당고개역과는 달리 많이 번잡하다. 전철이 지나온 전 정류장 노원역 방향으로 내려 간다. 잠시 뒤 4거리 길을 건너면 국민은행이 보인다. 이곳에서 1142번 버스를 타고 중계본동 주민센터에서 내린다. 미처 10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이다. 걸어도 20분을 넘기지 않을 길이다. 하차한 정류장 옆 건널목을 건너면 마을 골목길이 나타난다. 이 골목길로 들어가 현대APT담을 우측에 끼고 불암산 방향으로 1km남짓 간다. 갑자기 앞길을 서울노인교회 건물이 가로 막는다. 좌측으로는 원암유치원(932-4488)을 알리는 안내판이 매달려 있고 학도암 500m라는 안내글이 쓰여 있다. 가만 살펴 보면 교회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언제부터 이 곳이 이리도 인총으로 가득찬 것인가? 필자는 20대 초반 4년을 불암산 품에 안겨 있는 학교에 다녔다. 부리나케 청량리에 도착하여 인터벌이 길고도 긴 시영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였다. 한독약품이 자리한 동대문구 묵동을 지나면 버스길 빼고는 산기슭과 끝없는 들판이 이어지고 자연부락이 간간히 있었다. 수락산과 불암산에서 비롯한 자연하천 당현천(堂峴川)의 상류지역은 상계동(上溪洞), 중류지역은 중계동(中溪洞), 하류지역은 하계동(下溪洞)이 되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치하기 편하게 재편성하면서 무성의하게 지은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다. 아파트촌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이름만 남았으나 넓고 넓은 이 곳 마들평야는 바라만 보아도 행복했다. 가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논가운데서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 그렇게도 보기 좋았다. 마들평야, 이름의 뜻은 몰라도 풍족한 이름이다. 어떤 이들은 말이 뛰어 놀아서 마들평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궁해서 만든 말일 것이다. 이 지역에는 말기르는 마장(馬場)도 없었고, 공무(公務)로 움직이는 이들이 말을 빌리거나 묵어가는 역원(驛院)도 없는 들판이었다. 흔히들 경흥대로 상의 노원역(蘆原役)이 있었으니 그 역이 이 근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마는 경흥대로 상 노원역은 漢城府(지금의 수유리, 월계천 안쪽)에 있었음을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대동지지 등 몇 자료만 살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마들평야는 말(馬)과는 관련이 없을 것이다. 필자가 점쟁이의 마음으로 점을 쳐 본다. 아마도 남쪽 들이거나 큰 들이라는 말은 아니었을까? 조선시대 마들평야는 양주(楊洲) 땅에 속했는데 양주의 중심지는 지금의 불곡산 아래였다. 그 곳에서 보면 양주땅 남쪽에 넓고도 넓은 보배같은 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남쪽(마)들 이렇게 부를만 하지 않았을까? (참고: 남풍(南風)을 마파람이라 한다) 또 하나 점괘(占卦)는 큰들이다. 매미가 큰 놈은 말매미요, 잠자리가 큰 놈은 말잠자리요, 거미가 큰 놈은 말거미(왕거미)요, 무덤이 크면 말무덤이며 고개가 크면 말티(한티: 대치大峙)이다. 에라, 이 큰 들을 ‘말들’이라 한들 누가 무어라 하리. ‘말들 ->마들’ 지나친 비약일까. 이제부터는 마을길을 벗어나 과수원길과 숲길로 들어선다. 학도암과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상을 알리는 안내판과도 만난다. 안내판 대로 500여m 오르니 왼쪽으로 작은 절 모습이 보인다. 절을 수문장처럼 지키는 우뚝한 바위가 서 있다. 그 유명한 마애관음을 새긴 바위인가? 올려다 보니 아니다. 두 개의 사각형 작은 구멍을 뚫고 그 아래로는 무언가 내용을 기록한 암각(岩刻)이 보인다. 도선사 뒤 김상궁 마애사리공 바위, 관악산 만월암 마애사리공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절에서 마음 닦다 피안의 세계로 떠난 승려나 청정신도를 다비(茶毘, 화장)하고, 나온 사리(舍利: 수련을 많이 한 이들을 화장하면 남는 작은 구슬같은 결정체)를 넣어 둔 사리공(舍利孔)인데 사리함을 탐한 누군가가 도굴해 가고 빈 구멍만 뻥 뚫려 있다. 왼쪽 사리공에는 ‘청신녀월영영주지탑 가경이십사년기묘시월 (淸信女月影靈珠之塔 嘉慶二十四年己卯十月)’, 즉 청신녀 영월 사리탑, 청나라 인종 24년(1819년 조선 순조 19년) 10월이라 쓰여 있다. 청정하며 믿음이 독실하던 여신도 영월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아마도 200년전 무렵 살다간 궁인(宮人) 아니었을까?

오른 쪽 사리공에는 ‘환□당선사취근지탑 (幻□堂禪師就根之塔: 환□당 선사 열반탑)이다. 연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1800년대 어느 때쯤 열반에 든 스님이리라. 돌아가신 분을 높였겠지만 수행이 근본에 다가간 분이라 하니 속세에서 온 자, 머리 숙여 예를 표한다. 그런데 각자(刻字)를 자세히 보면 좌측 비명(碑銘)에는 한 발, 우측 비명(碑銘)에는 두 발의 총탄 흔적이 선명하다. 6.25 때 피아간에 누군가가 이 곳에 총질을 한 것이다. 幻□堂의 이름 가운데 글자는 이 탄흔으로 인해 없어졌다. 어떤 사람은 사리함을 도굴해 가고, 어떤 사람은 이름마저 앗아갔으니 아~ 이승을 떠났어도 이 분들은 얼마나 불편하시겠는가? 우리에게도 우리 떠나고 나면 이 땅을 면면히 이어갈 후배들이 있지 않은가? 먼저 살다간 이들에 대해 최소한의 예(禮)는 지키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절이름을 조그맣게 학도암(鶴到庵)이라고 써 붙였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학이 날아들기에 ‘학이 이르는 암자’라 했다 한다. 다분히 도교적(道敎的)이다. 인조2년(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창건했다 하는데 이 분은 불(佛)과 선(仙)을 아울러 깨쳐 학과 함께 우화등선(羽化登仙)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오른쪽으로 돌층계를 오른다. 20m가 넘는 우뚝한 바위에 마애관음보살이 양각(陽刻: 돋을새김, 행태를 나타내는 선을 살리고 주변의 면을 판 기법, relief)으로 새겨져 있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는 무심히 보아 당연히 선을 따라 판 일종의 선각화(陰刻 線刻畵)라 생각했었다. 그러다 두세번 온 후로는 모든 선이 양각으로 튀어 나온 것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20m가 넘는 바위를 캔버스로 해서 판 양각의 판화인 것이다. 과연 누가 이런 바위을 캔버스 삼아 붓과 칼(정과 망치)을 휘두른 것일까? 자연 위에다 예술혼을 뿜어낸 이들은 누구였을까? 다행히 기록이 남아 있다. 1800년대를 대표하는 금어(金魚: 불화의 대가 승려) 중 한 분인 한봉당 창엽이 밑그림을 그리고, 김흥연, 이운철, 원승천, 박천, 황원석 5인의 망치잡이가 파내려 갔던 것이다. 1870년(고종7년) 비용은 명성왕후 민비가 시주하였고, 최고의 금어, 아마도 경복궁 중수과정에서 돌 다루는 일에 공력(工力)을 쌓았을 최고의 석수들이 이루어 놓은 작품이다. 경기유행문화제 124호라 한다. 8년 뒤인 1878년 한씨집안에서 시주하여 보수하고 그 가족들의 축원을 우측 바위면에 남겨 놓고 있다. 마애불의 배에는 아마도 복장물(服裝物: 불상을 봉안할 때 불상 복부에 넣는 공양물)을 넣었을 것이다. 이것도 도굴당하여 빈 구멍만 앞가슴에 뚫려 있던 것을 지금은 채워 놓았다. 선운사 도솔암에 가면 백제 위덕왕때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마애불도 이와 똑 같은 위치의 복장유물은 도굴당하고 빈 구멍만 휑하니 열려 있다. 조선시대 이후 불상 수난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그만 자연동굴이었던 곳을 확장하고 약사전을 만들었는데 들어가 보니 약사불(藥師佛)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이제 산문을 나와 흙길로 이어가는 길을 따라 주능선으로 향한다. 길이 제법 가파르다. 10여 분 지났을까, 정상에서 삼육대학 방향으로 길게 뻗어나간 주능선에 도착한다. 선수촌 국가대표선수들이 죽음의 달리기로 체력을 키우는 코스이기도 하다. 좌향좌하여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정상방향을 향한다. 길은 알맞게 오르게 되어 있어 숨결 조정하고 땀도 내면서 간다. 20여 분 뒤, 돌무더기가 흘러내린 넓은 공터에 닿는다. 420봉이며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불암산성, 봉화대, 헬기장이다.

이 곳은 불암산 정상에서 남쪽 삼육대학, 태릉방향으로 내려 오다가 만나는 봉으로 남쪽 불암산의 이정표가 되는 곳이다. 불암산은 본래 이명(異名)이 많다. 하늘이 주신 보배로운 산이라서 천보산(天寶山)이며 정상부(頂上)가, 불심 깊은 이 눈에는 송라립 쓴 부처 모습이라서 불암산(佛巖山)이고 공자님 제자들 눈으로 보면 필암산(筆巖山, 붓바위산) 또는 필봉산(筆峰山: 붓봉우리산)이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먹골(墨洞:묵동)과 벼루말(硯村:연촌)도 불암산의 기가 미치는 곳에 있으니 종이마을만 보태면 지필묵연(紙筆墨硯: 종이, 붓, 먹, 벼루)으로 문방사우(文房四友)를 품게 되는 것이다. 한편 대동여지도에는 검암산(儉巖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 동구릉이 있는 구릉산까지를 검암산이라 했던 것 같다. 불암산성이라고 부르는 남쪽 420봉의 정확한 명칭은 좀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곳을 발굴했을 때 나온 토기들이 있다는데 신석기토기, 고구려토기, 신라토기가 그것이라 한다. 수락산길 걸을 때 이야기를 꺼냈듯이 이 곳 수락지맥(수락산~불암산~망우산~아차-용마산)에는 20기가 넘는 고구려 보루터가 발견되었다. 420봉도 고구려 보루였다가 신라가 이 곳을 점령한 후 확대하고 울타리도 높인 것은 아닐까 한다. 보루라고 하기에는 퇴뫼식城에 가깝고 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다. 전문가들이 잘 정리해 주실 것이다. 여기를 포함하여 연천, 도락산, 불곡산, 사패산, 임진강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유적들 체계화시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비할 교육의 장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중국은 50년대에 서남공정(西南工程)을 통해 역사 왜곡을 하더니 ‘신장 위그루’와 달라이라마의 나라 ‘티벳’을 점령해 버렸다. 왜 지금 중국이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고구려와 고려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하는 것일까? 서남공정을 보면 너무도 그 의도가 생생하다. 북한이 붕괴된다면 어찌될 것인가, 머리가 복잡하다. 불암산성을 버리고 온 길을 다시 내려 온다. 10여 분 뒤 이정표가 좌측길로 천보사(天寶寺)를 가리킨다. 길이 아주 가파르다. 다행히 흙길에 거리도 짧아 잠시 고생에 불과하다. 천보사는 신라 경문왕 8년(86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 문종실록에도 등장하니 조선초에도 존재한 것인데 탄압받던 그 시대에 창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고려때나 그 이전부터 존속했던 절일 것이다. 40여전 봉안한 마애불이 남불암산 암벽을 지고 앉아 계시다. 문화재적 가치는 없어도 기운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마애불이 계시다. 근세에 세운 마애불에서 눈길을 10여m 위로 돌리면 보일듯 말듯 고졸한 선각(線刻)마애관음이 수줍게 숨어 있다. 보물 1324호로 보호 받고 있는 시흥소래산 마애보살상과 유사한 보관(寶冠)을 쓰고 상호(相好)도 많이 닮았다. 예사로 볼 수 없는 선각마애보살상이다.

근년에 불사(佛事)한 대웅전 지붕 위 두 마리 코끼리상도 보고, 거북이를 타고 앉으신 용왕님도 만나고, 프라스틱으로 만들었는지 인공 바위굴 삼성보궁 속에 봉안한 삼성(三聖)도 살핀 후 산길을 넘어 불암사로 내려 온다. 차길을 따라 가면 속세로 가는 길이니 반드시 왼쪽의 산길로 가실 것. 고찰 불암사는 조선초에도 서울을 대표하는 4절 중 하나로 이름을 얻었다. 동 佛庵寺, 서 津寬寺, 남 三幕寺, 북 僧伽寺. 한국불교의 의식(儀式)을 총괄한 역저 석문의범의 저자 운호석연(雲湖錫淵)스님이 1927년 봉선사본말사지를 썼는데 그 책과 지금도 절 앞에 세워져 있는 사적비에 불암사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지증대사가 창건했다 한다. 불교를 배척 받던 조선조에서도 궁인들의 시주를 받았고, 철종의 내탕금(임금의 개인자금)으로 중수하기도 하였다.

근래에 불암정상을 등지는 쪽 바위에 마애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불암사는 성보문화재(불교분화재)가 많은 편이다. 경기유형문화재 53호로 보호받고 있는 591장의 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여기에 먹만 발라서 찍으면 책이 되는 것이다. 고려말 세 분 스승과 제자인 고승 지공, 나옹, 무학을 비롯하여 사명당 유정의 진영(眞影: 초상화)도 있다.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가 상궁시절 동료 강상궁과 시주하여 그린 괘불(掛佛)도 있는데 고종 32년(1895년)에 그린 것으로 공교롭게도 이 해 10월 을미사변(일본 낭인들이 민비를 시해한 사건)으로 민비가 세상을 떠난다. 이 그림에는 고종, 순종, 민비, 대원군의 만수무강, 국가만민 천하태평, 돌아가신 흥선대원군 부인 민씨의 극락왕생을 빈 화기(畵記)가 있다. 이듬해(1896년) 2월 민비를 모시던 엄상궁은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일본으로부터 위험을 피하여 극비리에 옮겨 간다. 이것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러시아공사관에 있던 1년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엄상궁은 고정의 승은을 입어 1897년 10월 왕자(영친왕 이은)을 출산하였다. 이 괘불의 발원자(엄상궁)이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발원의 대상 민비의 자리에 앉게 될 지 그 누가 예측이나 했겠는가? 전해지는 사진을 보면 엄상궁은 분명 얼꽝, 몸꽝이던데 . 절 앞 큰 바위에 조성한 마애사리공을 살펴 본다. 여기에서도 변함없이 빈 공간만 남았다. 눈에 띄는 것은 근년에도 누군가 새로 조성한 사리공이 있다는 점이다. 신선한 느낌을 준다. 이제 해지는 불암사 일주문을 나서 불암동으로 나온다. 화랑대역으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민비와 엄비를 생각한다.

교통편 4호선 상계역 1번출구 ~ 노원역 방향으로 내려와 4거리 길 건너 ~ 버스 1142번 환승(국민은행 앞) ~ 중계본동 주민센터 하차 걷기코스 중계본동 ~ 길건너 현대APT 담길 ~ 서울노인교회-원암유치원 ~ 학도암 ~ 불암산 주능선 ~ 불암산성 ~ 온길 back하여 천보사 ~ 불암사 ~ 불암동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이한성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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