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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 28] 불곡산, 양주관아

400여년 역사의 양주읍치와 불곡산길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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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42호 박현준⁄ 2011.10.04 13:39:57

이한성 동국대 교수 양주(楊州), 서울 중심가에서 1호선 전철을 타면 한 시간 이내에 닿는 곳이지만 마음의 거리로 보면 먼 지방도시를 가는 듯하고, 시간의 거리로 보면 아득한 옛날 그 어느 곳으로 가는 듯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더구나 백석면, 주내면, 유양리(동) 하면 참으로 낯설다. 전방부대에 근무하던 사나이들이라면 주내 검문소가 기억에 남는 다 할까. 고려시대에는 서울을 포함하여 경기지방 중심부의 상당 부분을 품고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서울의 동, 서, 북을 둘러싼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했던 땅이다. 이제는 서쪽과 동쪽을 고양시, 남양주시, 구리시 등에 떼어 주고 서울 인접 북쪽만을 포함하는 땅이 되었다. 더구나 남북분단 이후 북쪽에 있는 땅이다 보니 산악지역이나 접경지역은 대부분 민간인 통제구역이 되어 우리의 관심권에서 멀어져 갔다. 이제는 대부분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음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다. 오늘 이야기가 있는 길은 400여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양주읍치(楊州邑治)와 그 진산(鎭山: 도시의 主山) 불곡산(佛谷山)길로 떠나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 산천조 첫머리를 장식하는 산이 불곡산인데, 설명하기를 재주북삼리진산(在州北三里鎭山: 읍치 북쪽 3리에 있으며 양주의 진산이다)이라 했다. 도봉산이나 북한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보면 의정부 서북쪽 나지막하면서 제법 바위의 위용을 느끼게 하는 산이 바로 불곡산이다. 종로에서 탑승한 1호선 전철이 1시간이 미처 못되어 양주역에 도착한다. 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걸으면 미처 2km가 안되는 짧은 길임에도 오늘은 날씨가 덥기에 길을 건너 버스를 갈아탄다. 양주시청을 경유하는 버스노선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양주시청 앞에서 내린다. 층계를 올라 좌측 산모퉁이로 가면 친절한 안내도와 거리별 정보판이 잘 정비돼 있다. 불곡산 정상(상봉)까지 2.9km에 1시간 47분이 걸린다고 친절하게 알려 준다. 나무층계도 잘 갖추어져 있어 이 길이 낯선 이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고 있다. 길은 완만하게 오르는 흙 능선 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1보루를 지나고 다시 20여분 지나자 제2보루(295m)에 닿는다. ‘보루성’이라고 판에 써서 세워 놨다. 규모로 보면 성(城)이기보다는 후망 경계(堠望 警戒) 초소라 하는 게 어울릴 것 같다. 지금부터 1600여년 전의 일을 헤아려 본다. 이 지역은 백제와 고구려가 대립하던 곳이었다. 백제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은 국력을 키워 고구려와 맞붙었다. 고구려는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시대였는데 이때는 북경과 그 북쪽 땅을 지배하던 연(燕)나라와의 다툼으로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비롯하여, 왕모와 왕비조차 포로로 잡혀가는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었다. 굴욕을 참고 조공(朝貢)외교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했으나 국력은 피폐하고 국가적 자존심은 땅에 떨어진 시기였다. 이때 강력한 백제와 맞붙었으니 힘에 부친 싸움 끝에 고국원왕은 끝내 평양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의 일을 김부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드라이하게 기록하였다. “왕 41년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을 치니 막다가 유시에 맞아 이 달 23일에 돌아갔다(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率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이로써 이 지역의 패권은 백제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러나 열흘 붉은 꽃이 어디 있으랴. 19대 광개토대왕 때에 이르러 국력을 키운 고구려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강역을 넓혀 나가 남쪽으로 백제를 밀어 내더니, 그 아들 장수왕 때에 이르러서는 아예 수도(首都)를 만주 벌판 환인에서 평양으로 옮기며 남하정책을 밀어 붙였다. 이때 백제 개로왕은 아차성(또는 아단성)에서 고구려의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하니 그 아들 문주왕은 후일을 기약하며 공주로 옮겨가는 수모를 당했다. 이때의 일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보자. “왕이 도망쳐 나갔는데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헤아리며 아차성 밑으로 묶어 끌고가서 살해하였다.(王出逃 麗將 桀婁 等 見王下馬拜 已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 이후 고구려는 중원(계립령: 하늘재~죽령)까지 밀어 붙여 넓은 강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시작해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게 됐는데 불곡산 뒤 도락산, 앞 쪽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에 고구려는 보루를 쌓고 백제와 신라에 대응한다. 지금 남아 있는 불곡산의 9개 보루는 모두 고구려가 쌓은 것이다. 다른 지역의 보루나 작은 퇴뫼식 산성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의 토기 등 파편이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그 옛날 세 나라의 뺏고 빼앗기던 긴박한 역사가 우리를 긴장되게 한다. 길은 알맞게 고도를 높이며 이어 진다. 5보루(435봉)를 지나면서 암릉길이 나타난다. 화강암의 깨끗한 암릉길이다. 고도는 400m급이지만 아기자기한 암릉구간이 작은 공룡능선 같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시야도 탁 트여 도봉산, 북한산, 도락산이 가까이 다가온다. 백석면의 아담한 시가지와 들판도 바둑판처럼 내려다보인다. 이윽고 불곡산 정상 상봉에 오른다. 469m의 높지 않은 봉우리인데 위용은 늠름하다. 서울근교에 이처럼 아기자기하면서도 품위 있는 암릉산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즐거움을 선사한다. 암릉길 가파른 구간을 우회해 내려가면 7보루가 있는 상투봉(425m)에 닿는다. 상투봉에서도 다시 암릉길이 이어지는데 쉼터사거리가 있는 고갯길로 고도를 낮춘다. 불곡산 남녘 마을 사람들과 불곡산 북녘 마을 사람들이 넘던 고갯길이다. 이제는 넘는 이가 있을 리 없다. 불곡산 산객들이 쉬어 가는 쉼터 고개로 기능이 바뀐지 오래 됐다. 오늘의 불곡산 마지막 구간이 임꺽정봉이다. 여기서 오르는 길은 가파르게 치고 오르는 스릴 넘치는 구간이다. 오르는 이 편하라고 밧줄도 매여 있다. 위험한 구간은 아니다. 드디어 조그만 암봉(420봉)을 지나 바로 앞에 있는 불곡산 제2봉 임꺽정봉(445봉)에 닿는다. 바로 북쪽 도락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주요 포인트가 되는 봉이다. 필자가 한북정맥길을 걸을 때 이 구간을 눈쌓인 한겨울에 지나게 되었다. 고도는 낮으나 가파르게 솟아오른 비탈에 눈이 쌓여 있어 두 걸음 오르면 한 걸음은 뒤로 미끄러지던 그 날이 생각난다. 길은 철철이 그 맛이 다르다. 좋은 곳은 언제 와도 그 맛이 있다. 좋은 사람은 언제 봐도 좋은 것처럼. 양주 백정의 아들 임꺽정의 활동무대가 황해도 구월산인데 임꺽정의 출생지와 활동무대를 연결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 봉우리와 파주쪽 감악산에도 임꺽정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살기 힘든 민초들의 마음에는 의적(義賊)을 기다리는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하산코스로 접어든다. 능선길 3거리에 좌측으로 대교아파트로 내려가는 길 안내판이 붙어 있다. 30여분 뒤 오산리 삼거리로 내려 온다. 오늘 답사길 불곡산 구간을 마친 것이다. 이제 백화사와 양주관아로 향한다. 걷기에는 쾌적한 길이 아니니 다시 양주쪽으로 나가는 버스로 환승한다. 잠시 두어 정류장 지나 백화사 입구에서 내리자. 백화사는 불곡산 중턱에 있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면 절로 가는 포장도로가 잘 가꾸어져 있다. 산길을 포장도로로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사람을 지치게 한다. 다행히 길은 호젓한데다 좌로는 길 아래 계곡에 숲도 우거지고, 우로는 산이 진을 치고 있어 느긋이 마음만 먹는다면 걷기에 어려움은 없다. 20여 분 지났을까 양지 바른 터전에 작은 절이 자리 잡고 있다. 백화사(白華寺)의 원래 이름은 불곡사(佛谷寺)인데 신라 효공왕 2년(808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1592년) 때 소실되었다가 1598년 중건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佛宇)조에는 “불곡사는 불곡산에 있다(在佛谷山)”고 기록됐다. 1870년대 양주를 그린 지도에는 불곡산이 불국산(佛國山)으로, 불곡사는 이미 백화암(白華庵)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필자는 백화사란 이름이 6.25 이후 소실된 절을 재건하면서 바뀐 이름인가 했더니 이미 오래 전에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절은 그 터 말고는 6.25 때 완전 소실돼 고풍스러운 맛은 남아 있지 못하다. 다만 앞마당 노거수 느티나무는 이 절의 나이를 어림하게 해 주고, 노거수 옆에 제 자리를 못 찾고 서 있는 ‘도광 21년 신축 정월(道光 二十一年 辛丑 正月)’, 즉 청나라 선종 21년(1841년) 명(銘)의 어느 수령님 공덕비가 이 절의 나이를 아는데 도움을 준다. 특기할 것은 10여년 전에 이룬 대단한 불사(佛事)가 있다.

이 절로 내려오는 불곡산의 기운을 받아 뒷산 바위에 거대한 마애불을 조성했다. 예술적인 균형은 없어도 종교적 기운과 원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1000년 뒤에는 은진미륵과 같은 기념물이 될 것이다. 이제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내려온다. 10여분 내려오면 좌로 갈라지는 길에 ‘임꺽정 생가터’란 방향지시판이 서 있다. 잠시 뒤 길 아래 밭 같은 평평한 공지 한 가운데에 임꺽정 생가터를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이 터에 대한 설명도, 임꺽정에 대한 설명도 없으니 뭔가 빠진 듯하다.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 황해도를 근거지로 한, 간 큰 도둑이었다. 일반인들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은 벽초 홍명희(壁初 洪命熹) 선생이 1928년부터 11년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임꺽정’이란 소설 덕분이었다. 암울하던 시대에 의적 임꺽정은 조선 민초들의 가슴을 틔워 주기에 충분했다. 황석영의 ‘장길산’도 어찌 보면 임꺽정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명종실록에는 임꺽정에 대한 기사가 4번 실려 있다. 그만큼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임꺽정 체포를 위해 그 본거지를 습격한 관군장(牌頭)은 7발의 화살을 맞고 피살되기도 했으니 그 위세를 알만하다. 임꺽정에 대해 사관은 준엄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盜賊之熾發 由於守令之掊克, 守令之掊克 由於宰相之不廉).” 우리시대를 향해 생생히 외치는 소리인 듯하다. 이곳에서 10여 분 가면 유양동(維楊洞) 옛 양주관아에 닿는다. 이곳은 초기 고주내(古州內: 현 양주시청 동쪽 소홀읍 방향, 양주2동 근처)에 있던 관아를 중종 때 옮겨 400여년 역사를 가진 오랜 읍치였다. 동헌(東軒)도 복원했고, 양주 수령들의 공덕비며 영세불망비들도 모두 모아 놨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 가든지 그 고을을 수령했던 이들의 공덕비가 있다. 백성을 사랑한 목민관의 그 많은 공덕비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는데 왜 민초들은 그다지도 고달픈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 답은 아래의 예로써 대신하려 한다. 함양 상림(최치원 선생이 만든 인공 숲)에 가면 조선조 최고의 탐관오리며 동학농민전쟁의 원인제공자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공덕비가 있다. 이름하여 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 청덕과 선정이란 단어의 뜻을 새로 정의해야 할 일이 아닌가. 또 한 예는 이완용과 함께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박제순의 공덕비 두 개가 있다. 인천도호부 청사 앞에 있었던 것은 철거했다 하고 이인면사무소 앞에는 아마도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순찰사박공제순거사비(巡察使朴公齊純去思碑). 떠나간 뒤 두고 두고 생각한다는 비인 것이다.

이제 동헌 뒷마당, 정조가 1792년 세조의 광릉을 참배하고 귀경하던 길에 양주에 행차하였다. 그 때 활을 쐈는데 이를 기념한 비를 양주 목사 이채민이 세웠다. 어사대(御射臺: 경기 유형 82호)란 이름의 고졸한 비가 서있다. 양주의 또 하나 자랑거리는 국가무형문화재2호로 보호 받고 있는 ‘양주별산대’다. 조선조에는 산대도감이라는 관청이 있어 연희(演戱: 공연예술)를 즐겼는데 인조 때인 1634년 폐지되었다 한다. 그러니 여기에 속했던 예인(藝人, 伴人:편놈)들이 각기 연고지로 흩어져 공연패를 만들게 되었다 한다. 이 때 형성된 놀이패가 애오개산대, 노량진산대, 퇴계원산대, 녹번리산대, 구파발산대, 사직골딱딱이패 등이었고 이들로부터 기예를 전수받은 곳이 양주와 송파인데 이들을 ‘본산대(本山臺)’에 비춰 ‘별산대(別山臺)’라 불렀다. 양주별산대는 이을축이 중심이 된 사직골딱딱이패에게 기예를 전수 받았다고 한다. 관아터 동쪽으로는 양주별산대전수관과 공연장이 있다. 토,일 오후 3시부터는 공연이 펼쳐진다. 오랜만에 만나는 산대 탈춤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석인다. 해학과 신바람이 일주일 피로를 풀기에 충분하다. 공연장 옆에는 양주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2호)가 있다. 아쉬운 것은 문을 걸어 놨다는 점이다. 문을 열고 다녀가는 이들에게 옛성현 말씀 한 마디라도 전해주는 해설사가 계셨다면 좋았을 것인데… 향교 앞을 지키는 오랜 느티나무가 시원한 바람소리를 내며 위로해 준다. 100m 내려오면 시내로 나오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교통편 지하철 1호선 양주역~ 길건너 버스환승 유양동방향(32, 35, 36, 36-5, 39, 39-5, 50, 51, 55, 133) ~ 양주시청 하차 걷기 코스 양주시청 좌측 진입로 ~ 능선길 진입 ~ 1보루(245봉) ~ 2보루(295봉) ~ 향교방향갈림길 ~ 철탑 ~ 백화사방향갈림길 ~ 5보루(435봉) ~ 불곡산정상(상봉, 469봉, 6보루) ~ 상투봉(425봉, 7보루) ~ 임꺽정봉 앞 갈림길 ~ 임꺽정봉(445봉, 8보루) ~ 대교아파트 ~ 백화사 입구 ~ 백화사(마애불) ~ 임꺽정 생가터 ~ 양주관아 ~ 양주향교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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