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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 에세이]평생 탱고음악과 함께한 아스토르 피아졸라

길거리 탱고음악을 세계 콘서트장에 올린 아르헨티나의 음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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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43호 박현준⁄ 2011.10.12 14:25:12

탱고 음악과 춤은 19세기 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우루과이 항구 지역 사창가에서부터 시작됐다. 조국과 애인을 그리워하던 독일·이탈리아·스페인의 선원들이 사창가를 찾았을 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남자들끼리 춤을 추고 듣던 음악이 바로 탱고이다. 초기의 탱고는 아코디언과 바이올린으로 연주됐다. 이후에는 독일에서 들어온 반도네온이 리드악기가 되었는데, 이유는 독일 선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도착했을 때 향수에 젖어 흘러나오는 쓸쓸한 탱고 음악이 이 악기와 잘 조화됐기 때문이다. 반도네온은 1854년에 독일의 하인리히 반드에 의해 발명됐는데, 처음에는 피아노를 살 수 없는 서민들과 교회 음악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20세기 초 탱고 음악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길가에서부터 유럽과 미국으로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4분의2 또는 4분의4박자의 단순한 탱고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가 피아졸라가 미국의 재즈 음악과 유럽의 클래식 음악을 접목시켜 새로운 탱고가 탄생했다. 일례로 1992년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음악은 전 세계 콘서트홀에서 인기를 얻고 있고,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창단 45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에서 피아졸라의 음악만을 공연했다. 그리고 대만 출신의 세계적 첼리스트 요요마가 그의 음악을 자주 연주했으며 음반도 출시했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네 살 때 뉴욕으로 갔고, 거기서 자라면서 피아노도 배우며 재즈와 바흐 음악을 접하게 됐다. 피아졸라가 아홉 살 때 그의 아버지 노니노는 아르헨티나에서 듣던 반도네온 음악이 그리워 전당포에서 반도네온을 19달러에 구입해 아들에게 줬다. 그리고 피아졸라는 곧 이 악기에 능숙해졌다.

열세 살 때 피아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탱고 음악의 가수 가르델을 만난다. 그는 피아졸라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밴드와 같이 공연한자고 말했지만, 피아졸라의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나 어리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때 비행기 사고로 가르델 밴드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여졌는데, 후일 피아졸라는 “만약 자신이 아버지를 거역하고 가르델을 따라갔다면 지금은 천국에서 반도네온 대신 하프를 연주하고 있을 것이다”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1937년 미국에 경제 공황이 닥치자 피아졸라 가족들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아르헨티나에서는 춤을 위한 전통적인 탱고만이 연주되고 있었다. 피아졸라는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고 있던 세계적 피아니스트 아서 루빈스타인의 연주를 보고 그를 위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후 찾아갔는데 루빈스타인은 피아졸라에게 아르헨티나의 최고 작곡가 히나스테라를 사사할 것을 권했다. 탱고보다 더 고상한 음악의 작곡가가 되기를 원했던 피아졸라는 새벽 3~4시까지 탱고 클럽에서 연주하고, 낮에는 스트라빈스키·바르토크·라벨 등 작곡가의 음악을 열심히 공부하고 작곡도 했다.

1953년에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심포니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1954년에는 프랑스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에서 전설적인 음악 교육자 나디아 불랑제를 찾아갔다. 피아졸라가 10년 간 작곡한 악보를 자세히 살펴본 불랑제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이 음악은 잘 만들어졌다. 이 부분은 스트라빈스키 같고 이 부분은 바르토크, 그리고 여기는 라벨 같다. 그러나 피아졸라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피아졸라에 대해 묻고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어떤 음악을 하고 있는지 캐묻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아졸라는 수치심을 감추면서 “탱고를 연주한다”고 고백하자 그녀는 피아졸라에게 탱고 음악을 피아노로 쳐보게 한다. 그러자 “이 바보야! 이게 바로 피아졸라야”라면서 단숨에 피아졸라의 인생과 음악을 바꾸어 놓았다. 피아졸라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0년 간 자신이 작곡한 모든 음악을 2초 만에 버렸다고 고백했다. 불랑제 선생은 미국의 조지 거슈인에게도 2등의 불랑제가 되지 말고, 1등의 거슈인이 되라고 충고해 그를 세계적 음악가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다. 1955년에 피아졸라는 다시 미국 뉴욕으로 돌아가 자신의 누에보 탱고를 연주하면서 유명해졌다. 1959년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음악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노니노(피아졸라의 아버지)여 안녕히 가세요’를 발표하고 그 후 그의 음악은 새로운 방향을 찾아 흘러갔다. 피아졸라는 1942년에 결혼을 하고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1960년대 그는 가족 앞에서 “나는 떠나야겠다”며 집을 나갔다. 여러 명의 가수들과 염문을 뿌리면서 그들을 위해 노래를 작곡했으며, 1968년에는 오페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를 작곡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그의 두 번째 부인과 같이 프랑스 파리에 살면서 연주 생활을 하고 유럽에서도 유명해졌다.

그는 ‘아디오스 노니노’ ‘리베르 탱고’, 그리고 새벽 3~4시에 밴드의 단원들과 같이 작곡한 ‘제로아워’ ‘섹테스’ 등 많은 음악을 작곡해 유명해졌다. 또한 그는 탱고의 세계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던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존경받는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평생 줄담배를 피운 피아졸라는 1988년에 심장 관상동맥우회로 수술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파리에서 뇌졸중에 걸려 의식을 잃었다. 이에 의사들은 희망이 없다고 진단했다. 그러자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보잉707기의 일부를 중환자실처럼 개조하고 파리로 보내 피아졸라를 조국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년 후 일흔한 살의 나이로 피아졸라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거의 모든 일생을 탱고 클럽과 탱고 연주장에서 보냈고 약 3000곡을 작곡했으며 약 500곡을 녹음하였다. 그리고 그는 많은 아르헨티나 사람에게 즐거움과 자부심을 심어주었으며 조국의 영웅이 된 음악인이다.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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