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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 에세이]세계 최고 지휘자이자 평화·인권운동가 바렌보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평화와 팔레스타인의 인권 위해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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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44호 박현준⁄ 2011.10.17 13:31:17

번스타인과 카라얀 이후 현재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마리스 얀손스, 리카르도 무티, 사이먼 래틀 등 수많은 지휘자들이 세계의 박수갈채를 받고 있지만, 바렌보임만큼 화제가 되고 있는 마에스트로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마에스트로일 뿐만 아니라 1967년에 영국의 자랑이자 가장 뛰어난 미녀 첼리스트인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 후 그녀가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다발성경직’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연주를 중단하게 됐고, 마흔두 살에 세상을 떠나자 자클린에게 동정여론이 이는 동시에 동거하는 여인이 있었던 바렌보임에게는 차가운 눈초리가 쏟아지기도 하였다. 바렌보임은 현재 아르헨티나, 이스라엘, 스페인의 시민이며 팔레스타인에도 출입 허가증을 갖고 다니는 글로벌 시민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어느 지휘자보다도 높은 출연료를 받는 가장 성공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크리스마스가 오면 자신의 출생지인 아르헨티나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케스트라’와 야외 공연을 했는데, 이 공연에는 수만 명의 관객이 모여든다. 관객들은 바렌보임을 국민적 영웅으로 환영해주고, 바렌보임은 그곳에서 아르헨티나의 국민음악 탱고를 연주한다.

바렌보임은 이스라엘 정부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지만, 이스라엘 국민은 그를 국가적인 자랑으로 우대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적국인 팔레스타인에서도 중동평화의 운동가로서 존경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 국가인 아르헨티나와 유태교 국가인 이스라엘, 그리고 무슬림 국가 팔레스타인에서도 존경받는 유일한 음악인이자 사회운동가, 그리고 정치인인 셈이다. 바렌보임이 그 어느 음악인보다도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이유는 유태인이자 이스라엘의 국민으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 외교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아랍 젊은이들로 구성된 ‘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음악을 통해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의 상호이해와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위해 용감히 나섰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된 것이다. 그는 1942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으나 열 살 때 부모를 따라 유태인의 조국인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열두 살의 나이에 지휘도 공부했지만 정식 음악 학원을 졸업하지는 않았다. 1952년 그는 비엔나와 로마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는데, 베를린 필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그를 신동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뉴욕 필에서 데뷔했다.

1966년 크리스마스 때 영국 최고의 천재적인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를 만나고 이스라엘에서 결혼했는데 이때 바렌보임의 친구인 주빈메타가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유태인 행세를 하면서 들러리를 서준 해프닝이 있었다. 당시 바렌보임과 자클린은 클라라와 로버트 슈만 이후의 ‘최고의 음악인의 사랑’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가장 유명한 음악인 부부가 되었다. 이후 바렌보임은 1967년에 런던 필하모니와 지휘자로서 데뷔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자신이 직접 연주하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재능을 보임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그리고 자클린의 연주를 지휘하는 바렌보임의 모습은 지금도 DVD를 통해 즐겨볼 수 있다. 바렌보임은 1975년부터 1989년까지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다. 이때 런던에서 병치료를 하고 있던 자클린과 바렌보임은 주말부부가 됐으며, 바렌보임은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자클린과 가까이 있기 위해 파리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30대의 젊은 바렌보임은 러시아 피아니스트 엘레나와 동거를 하고 아이를 가졌다. 자클린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신문과 잡지까지도 비밀을 지켜주었다. 그러다 바렌보임은 자클린이 사망한 후 엘레나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바렌보임은 또 한 명의 전설적인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에 이어 1991년부터 2006년까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됐으며, 1992년부터 지금까지 베를린 국립 오페라 상임지휘자이다. 2001년 7월 바렌보임은 베를린 국립오페라를 이끌고 이스라엘서 공연을 하게 됐는데, 그는 바그너 음악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하고 싶어 했지만 그때까지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은 금지됐다. 대신 슈만과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연주한 후 앙코르 시간이 오자 바렌보임은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반대하는 사람은 연주장에서 퇴장해달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건국 이후 처음으로 바그너의 음악이 연주된 것이다.

1999년에 그는 팔레스타인의 저명한 학자이자 저술가인 사이드와 친구가 되고, 이 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팔레스타인의 인권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 이 둘은 이스라엘과 아랍 음악인들의 ‘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매년 여름 스페인의 세르비아에 모여 바렌보임의 지휘로 연습을 한다. 그들의 꿈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었으며, 2005년 8월에 팔레스타인의 라말라에서 사이드의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이들 젊은 음악인들은 언젠가는 이스라엘에서도 콘서트를 가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매년 여름 함께 모여 연습하고 있다. 2002년 바렌보임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정책은 비도덕적이며 정략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국회는 바렌보임에게 최고의 문화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대통령과 문화부장관이 참석한 이 수상식에서 바렌보임은 이스라엘의 정책이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에 상반되며, 팔레스타인과 아랍국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바렌보임은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의 음악이 중동의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이런 음악활동은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평화를 만드는 작은 시작이 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분단된 한반도에도 언젠가는 남북오케스트라가 생기고 이를 통해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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