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하면 낙엽, 식욕, 단풍, 여행, 추수, 쓸쓸함 등 수많은 단어가 떠오른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불리는데 기후가 매우 좋은 계절임을 형용해 이르거나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책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다. 책은 마음의 양식인 만큼 책을 통해 마음을 살찌우는 계절이 아닐까 한다. 이와 관련해 책을 다양한 미술작품으로 만날 수 있는 전시인 ‘예술가의 서재’전이 롯데갤러리 본점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AVENUEL) 전층(지하1층~4층)에서 9월 29일부터 11월 15일까지 열린다. 책을 공통소재로 작업하는 서유라, 안윤모, 임수식, 최은경 4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에 있어 작가들에게 책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 23점이 전시된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모두 책이라는 공통된 소재로 작업하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책을 설명한다. 최은경, 책을 통해 풀어가는 인간과 인류의 근원
에비뉴엘 1층에 설치된 거대한 책 여덟 권은 최은경 작가의 작품 ‘더 포비든(The Forbidden)’이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죄’와 ‘정직’, 인류의 근원 ‘어머니’ 등에 주목해왔다. 그리고 그 소재를 책을 통해 풀어간다. 동서고금을 막론해 인류의 중요한 유산이자, 미덕인 책에 주목한 작가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책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을 비튼다. 그렇게 많은 책들이 나도는 이 세상은 책 속 내용처럼 제대로 굴러가는가? 책을 읽으며, 또 읽자고 소리치는 지식인들은 책처럼 삶을 살아가는가? 책이 잘못된 것일까, 읽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까? 작가는 “책에 대한 사람들의 기존 인식들을 바꾸고 싶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단단한 인식들을 뒤집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작가 최은경의 작업은 책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것이다. 임수식, 책장 속 인간의 소유욕을 엿보다
에비뉴엘 2층에서 전시를 가지는 임수식 작가는 자신의 서재뿐만 아니라 학자(건축가 김대균, 북디자이너 정병규, 사진가 홍순태 등)의 책장을 찍는다. 촬영을 하고 나면 이미지를 고른 후 텍스트를 모두 지우고 촬영한 서가들 중에서 선별해 책이 오브제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도록 설정한다. 특히 두 가지 방식을 고수하며 작업을 지속하는데 하나는 손수 바느질을 하여 책장의 조각들을 기워나가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서재의 주인과 책장을 매칭시킬 수 있도록 다큐멘터리적 맥락을 고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 주인의 손때와 세월, 수집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장은 주인의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 지식을 탐하는 인간이라면 마치 쇼윈도를 바라볼 때와 같은 욕망의 느낌을 갖도록 한다. 안윤모, 의인화한 동물들의 편안한 휴식
에비뉴엘 3층에 전시되는 안윤모 작가의 작품은 보다 단순하며 명쾌하다. 그가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관람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인데 의도적으로 가벼운 시각에서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동물을 의인화한 우화적 장치를 설정한다. 커피와 독서, 자신의 띠인 호랑이와 부엉이를 사랑하는 아주 일반적인 취향은 달밤, 숲의 침묵 속에 책을 들고 등장하는 부엉이나, 커피를 마시며 테이블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호랑이들을 만들어냈다. 일제히 화면 밖 관람자를 응시하는 무표정한 호랑이들은 관람자가 옆 테이블에 앉기만 하면, 바로 등을 돌리고 다시 왁자지껄 수다를 떨어댈 바로 그 모습이다. 서유라, 책으로 말하는 너와 나의 세상이야기
에비뉴엘 4층에서는 책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끄집어내 작품으로 표현하는 서유라 작가의 작품이 있다. 일반적인 형식으로 가지런히 책이 쌓이지 않고 뒤죽박죽 섞어서 쌓여져 있다. 서유라는 책장, 책이 마구잡이로 뒤죽박죽 쌓여있거나 상하좌우로 확대되고 있는 양상을 그린다. 마치 읽다가 던져둔 듯한 책들은 펼쳐지거나 접힌 상태로 드러나고 책 등에는 제목이 적혀있다. 그녀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고자 했던 까닭이다. 때문에 현실에서는 쌓기 힘든 구성으로 그녀가 만들어낸 재구성된 화면을 보인다. 실제 책의 색을 바꾸기도 하고 없는 책을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 그림마다 주가 되는 책이 있는데 그에 따라 색이 바뀐다. 무거운 주제는 어두운 색, 사랑은 핑크빛 등 이야기와 테마별로 색감도 달라진다. 특히 유사한 내용의 책들이 제목에 따라 같은 공간에 모여 있어 어떤 이야기들을 담은 책들인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