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아론 코플랜드와 조지 거슈인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색을 잘 살려 ‘소리’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미국의 음악을 전 세계로 전파시킨 장본인들이다. 코플랜드는 미국의 민속 음악을 현대 음악에 접목시켜 미국의 소리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 작곡가이다. 또한 느리고 천천히 변화하는 화성(Harmonic)은 미국의 광활한 대륙을 연상케 한다. 충격적인 편곡과 대조적 리듬을 동시에 사용하는 폴리리듬, 여러 개의 현을 동시에 연주하는 폴리코드, 다양한 음색법 등 현대 음악의 기법을 콘서트홀에 도입한 사람이다. 코플랜드는 리트바니아의 유태인 후손으로 뉴욕의 유태인 동네인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잡화상의 주인으로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노래도 부르고 피아노도 즐겼다. 그의 형은 바이올린을 했으며 누나는 코플랜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1913년부터 1917년까지 그는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는데 열다섯 살에 폴란드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이그나시 파데랩스키의 연주를 본 후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유명한 음악 선생이자 작곡가인 골드마크에게 화음과 작곡을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낭만주의 형태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댄스밴드에서 연주도 하면서 대중음악도 함께 접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코플랜드는 유럽 음악을 더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교육자 나디아 불랑제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그녀는 바흐부터 스트라빈스키까지 가리지 않고 폭 넓게 모든 음악을 가르쳤으며 코플랜드는 1년을 목표로 유학을 떠났으나 3년 간이나 파리에 머물렀다. 또한 그는 허밍웨이, 거투르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같은 미국의 아방가르드 문학가들과 친구가 되고 피카소, 샤갈, 모딜리아니 같은 아방가르드 화가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1925년에 미국에 돌아온 코플랜드는 카네기홀 근처에서 지내며 구겐하임 재단의 도움을 받고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29년에 ‘교향적 송가(Symphonic ode)’와 1933년에 짧은 심포니를 작곡했으나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는 유럽과 멕시코를 여행하면서 ‘엘 살론 멕시코(El Salon Mexico)’와 같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39년에는 할리우드 영화 음악도 작곡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 코플랜드는 발레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1939년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가 대성공하면서 스트라빈스키가 발레 루스의 작곡가로 거듭났듯이 코플랜드는 미국 발레의 작곡가가 되어 총4편의 발레를 작곡했다. 1941년에 제2차 세계대전의 분위기를 반영한 피아노 소나타를 발표했는데 발레 ‘로데오’와 미국의 국민 무용수 마사 그래햄을 위한 작곡한 ‘애팔래치아의 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이 되었다. 그리고 ‘링컨 초상화’와 ‘보통 사람들을 위한 팡파르’는 미국의 애국 음악이 됐고, 코플랜드는 1944년에서 1946년까지 세 번째 심포니를 작곡했는데 이는 20세기 미국의 가장 인기 있는 심포니가 됐다. 1950년에는 현대 음악의 창시자 쇤베르크의 12음계법을 이용한 ‘피아노 4중주’를 작곡했다. 그는 러시아 혁명에 우호적이었으며 진보 성향의 좌파 지식인 친구가 많았는데 공산주의자로 의심을 받아 상원에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증언까지 해야 했다. 코플랜드는 1960년대에 들어서 작곡보다는 자신의 음악을 지휘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와 음악을 녹음해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는 동성연애자로서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했는데, 1980년대에 알츠하이머 병으로 투병하다 1990년에 뉴욕에서 아흔 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코플랜드는 유럽의 전통적인 음악으로 시작해 미국의 토종 음악과 현대 음악의 흐름을 접목시켜 미국의 특색이 담겨 있는 고유의 음악을 만들어냈으며 영화와 부수(Incidental) 음악을 통해 소수의 클래식 음악팬뿐만 아니라 모든 미국인의 사랑을 받은 다재다능한 음악인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브로드웨이와 콘서트홀의 거재 거슈인 조지 거슈인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작곡가이다. 그는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음악가이면서 미국의 재즈 음악을 클래식에 도입하여 ‘아메리칸 인 파리’ ‘애팔래치아 스프링’ ‘포기 앤 베스’ 같은 음악으로 전 세계의 콘서트홀을 장식한 미국 음악의 챔피언이기도 한다.
거슈인은 1898년에 뉴욕의 유태인 동네인 블루클린에서 태어났으며 1937년 서른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뇌종양(암)으로 사망했다. 브로드웨이 쇼와 대중적 노래를 통해 부자가 됐는데 그가 사망할 당시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번 음악인으로도 기록됐다. 그가 유럽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가서 라벨에게 음악을 배우려 하자 라벨은 거슈인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본 다음 “당신이 내 선생이 되어야겠어요”라고 답했다. 또한 당시 유럽의 가장 유명한 음악 선생이었던 나디아 불랑제에게 사사를 요청했는데 그 여자는 “당신은 이미 일등의 거슈인이요. 나는 그대를 이등의 불랑제로 만들고 싶지 않소”라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12음계 창시자이자 현대 음악의 거장인 아놀드 쇤베르크도 “이미 훌륭한 거슈인인데 열등한 쇤베르크로 만들고 싶지 않소”라면서 거절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모든 음악의 선두자들이 거슈인의 천재적 창의성과 미국 음악의 독보적 위치를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거슈인은 열 살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며 콘서트홀을 자주 찾았다. 열다섯 살에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뉴욕 틴 팬 애리(Tin Pan Alley)에 밀집한 음악 출판사에 입사하면서 미국의 대중음악과 재즈를 접하게 됐다. 열일곱 살에 대중적으로 노래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19년에 내놓은 ‘스와니’로 대히트를 쳤다. 1924년에는 그의 형 이라(Ira)가 작사를 하면서 뮤지컬을 발표했으며 ‘환상적인 리듬’ ‘오, 숙녀여 선량하라’와 같은 노래가 대성공을 거뒀다. 그 후 ‘오, 케이(Oh, Kay)’ ‘재미있는 얼굴’ ‘밴드를 울려라’ ‘쇼걸’ ‘아이 갓 리듬’ 같은 히트곡을 연이어 만들었다. 거슈인은 스물여섯 살이던 1924년에 최초의 클래식 음악인 ‘랩소디 인 블루’를 발표했으며 1928년에는 ‘파리의 미국’을 발표했는데 이 둘은 그의 음악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곡이 되었다.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35년에 ‘포기 앤 베스’를 발표하면서 이 음악을 민속 오페라로 정의했는데 이 곡은 20세기 미국의 가장 중요한 오페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오페라는 미국 남부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한 사람을 제외한 전 출연자가 흑인이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 ‘여름’ ‘나는 가진게 없다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같은 노래는 미국의 상징적인 노래가 되었다. 이 음악인들은 미국의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흥겹고 신나는 음악일 것이다. 1937년 거슈인은 할리우드 영화 음악을 작곡하던 도중 사망했으며 미국의 유명 소설가 존 오해라는 “조지 거슈인은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으면 그것을 믿지 않아도 된다”라며 거슈인의 불멸의 음악을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