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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 에세이]철의 장벽에 금을 낸 클라이번

미·소 냉전 때 모스크바 콩쿠르에서 미국인 첫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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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47호 박현준⁄ 2011.11.07 12:59:10

번스타인 외에도 미국의 자존심을 살려준 음악인이 있다. 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밴 클라이번이다. 그는 1934년에 석유와 축산업의 본고장인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전 사업가였으며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1958년은 구소련과 미국은 냉전의 절정기였으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콩쿠르가 열리기 전에 소련은 스푸트닉을 우주로 발사했으며 세계는 핵전쟁이 검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하여 4년마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이 콩쿠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의 문화적 우월성을 겨루는 하나의 전쟁터이기도 했다. 이 콩쿠르에서 스물여섯 살의 클라이번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3악장과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으며 심사위원들은 클라이번이 ‘최고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소련의 주적인 미국의 클라이번에게 금상을 주는 것은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인 흐루시초프의 승인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심사위원장이 흐루시초프 서기장의 의견을 구하자 그는 “그 미국인이 정말로 최고냐?”라고 묻고 그렇다면 그에게 상을 주라 명하였다. 이 때 쇼스타코비치가 클라이번에게 시상을 하고 흐루시초프가 클라이번과 같이 사진을 찍으며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서방 언론은 “클라이번이 처음으로 철의 장벽에 금을 냈다”고 평가했다.

클라이번이 우승하고 귀국하자 클래식 음악의 애호가뿐만 아니라 온 미국인이 열광했고 그는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시카고의 엘비스 프레슬리 클럽의 이름을 클라이번 클럽으로 바꿨을 정도였다. 그 후 클라이번은 흐루시초프에게 직접 부탁해 자신의 연주를 지휘했던 러시아 지휘가자 미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클라이번은 흐루시초프의 초청을 받고 러시아를 다시 방문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연주했다. 피아니스트로 성장하는 데 어머니 영향 커 클라이번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어머니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으며 네 살 때 이미 악보를 완전히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일곱 살 때까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 후 줄리아드 음대에서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러시아 출신의 로지나 레빈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줄리아드 음대의 카페테리아서 클라이번은 아주 인기 있는 학생이었으며 이곳에서 최고의 흑인 소프라노 레온타인 프라이스와 좋은 친구가 되기도 했다. 클라이번은 모임에 늦게 나타나기로 유명했는데 그의 동창생들은 그가 언젠가는 세계적 대스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졸업사진을 촬영할 때도 30분이나 늦게 나타났는데도 친구들은 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클라이번이 모스크바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어린 나이에 크레믈린과 성바실리 사원의 그림을 보았을 때였다. 그는 어머니에게 성바실리 사원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고 하며 어머니는 그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20여 년 후에 모스크바에 나타났다. 정치적 억압과 미국에 대한 적개심에 가득 찼던 러시아 시민들은 장신의 미남 클라이번의 활짝 웃는 친근한 모습에 완전히 매혹됐으며 클라이번은 “타고난 시민 외교관”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 언론에게 러시아 사람들은 매우 진지하며 텍사스 사람과 같다고 칭찬하면서 텍사스인은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라 말했다. 러시아에서 귀국한 클라이번은 뉴욕 필하모니와는 물론 전 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그는 콩쿠르에서 우승하기 전에 시카고 심포니와 아주 적은 돈을 받고 연주 계약을 맺었는데 러시아에서 돌아온 후 그 계약을 끝까지 지켜 모든 미국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면서 근 20년 간 많은 연주를 하고 RCA와 음반도 만들었다. 그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클래식 음악으로는 처음으로 100만 장이 팔렸으며 이후 300만 장을 돌파했다. ‘텍사스 사람’다운 풍모에 여성팬 줄서

쉼 없는 활동에 재충전의 필요성을 느낀 클라이번은 1978년부터 9년 간 긴 안식년을 가졌다. 1987년 냉전 종식의 필요성을 느낀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방문할 때 클라이번이 백악관에서 연주를 했다. 그는 “나는 러시아 사람을 사랑합니다. 러시아의 예술을 사랑합니다”라고 선언하면서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을 포옹했다. 그러자 다음날 긴장감에 싸여 있던 고르바초프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밴 클라이번의 피아노 연주가 러시아와 미국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 후 1989년 클라이번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열렸던 차이코프스키홀에서 다시 연주를 하고 가는 곳마다 러시아 시민들이 환호를 받았으며 특히 젊은 여성들은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몇 시간씩 기다렸다. 귀국한 후 그는 18개의 미국 도시에서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다. 시카고의 그랜드파크에서 미국 태생의 슬래트킨의 지휘로 야외 공연을 했는데 공식적으로 35만 명이 참가했다. 미국 시골 출신의 클라이번이 전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사랑하는 피아니스트가 된 것에는 그의 뛰어난 기술도 있었지만 인간성과 스타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명성에 도취되지 않고 겸손하며, 팬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이었고, 탁월한 스타 기질의 소유자였다. ‘전정한 스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다’는 외국의 격언이 맞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 태생으로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며 미국의 문화적 자존심을 살리는 데 큰 힘이 됐다. -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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