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초에 한국 전자업계에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바로 이마트가 ‘드림뷰’라는 염가형 TV를 내놓고 단 이틀만에 준비한 5000대가 모두 팔리는 기염을 토한 사건이었다. 드림뷰 TV를 단순히 ‘이마트가 값싼 TV를 내놓아 장사를 잘했다’ 정도로 축소해 볼 수도 있다. 대형 마트의 기획 상품이 히트를 친 작은 사례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한국에서 재벌 가전업체와 소비자 사이에 소통이 완전히 단절됐다는 양상을 돌이켜본다면 이마트의 ‘가격파괴 TV’가 주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고 볼 수도 있다. 지난 11월 8일 소비자시민모임(이하 소시모)가 조사-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구촌의 ‘가전 대국’인 한국의 전자제품 값은 비정상을 지나 거의 ‘미친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 바다 건너 외국에 판매하는 TV, 스마트폰, 태블릿PC의 값이 외국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소시모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세계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한다는 LED TV는 국내 가격이 조사대상인 18개 국 중 당당 2위이고, 스마트폰과 태블릿PC는 4위다. 국산품을 국내에서 팔면 물류-통관비 등이 절약돼 가장 값이 저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최고 값에 국내에서 팔리는 현상이다. 이는 마치 제주도에서 만들어 파는 제품이 비행기로 퍼 날라야 하는 서울에서 가장 싸고 제주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다는 이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외국의 예를 들자면 미국의 경우 정유공장이 몰려 있는 텍사스 주에서 기름값이 가장 싸고, 텍사스에서 멀어질수록 값이 비싸진다는 ‘정상적 가격 분포’와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판매가 이뤄진다면 텍사스 사람들은 대단히 화를 낼 것이고, 정유업체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단가 책정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 한국의 재벌 가전업체와 소비자들 사이에는 이런 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예컨대 작년 11월 발매된 삼성전자의 태블릿PC ‘갤럭시탭’의 경우를 보자. 한국과 미국 등 전세계에서 동시 발매된 갤럭시탭의 국내 발매가는 99만 원이었다. 반면 거의 똑같은 물건이 미국에서는 559달러에 발매됐다. 타이완계 미국인이 만든 TV 수입업체 ‘비지오’가 2003년에 ‘반값 TV' 내놓고 코스트코가 판매하면서 대박 행진 이어가. 덕분에 TV 값은 뚝뚝 떨어지고… 그러자 미국의 경제지 월스트릿저널은 “한국 삼성전자가 만드는 갤럭시탭이 한국에서 미국보다 1.5배나 비싼 값에 팔린다”며 “한국에서 만드는 핸드폰 값이 한국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팔리더니 태블릿PC 시대를 맞아서도 이런 양상은 그대로”라면서 한국의 왜곡된 가격 구조를 비꼬았다. “왜 이렇게 한국 시판 값이 비싸냐?”는 월스트릿저널 기자의 질문에 삼성전자의 대답은 태연자약 그 자체였다. “한국 내 시판 갤럭시탭에는 위성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DMB와 내비게이션 기능이 추가됐고, 높은 애프터서비스 수준을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이 대답 중 타당성이 아주 조금 인정되는 것은 ‘높은 애프터서비스 수준’뿐이다. 한국의 애프터서비스 수준은 미국보다 월등 우수하고, 특히 삼성-LG 같은 대기업 전자업체의 애프터서비스 수준은 칭찬할만 하다. 전화만 걸면 바로 당일 달려와 고쳐 주기 때문이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에선 사람이 움직이는 이런 서비스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에는 한국과는 비교 안 되게 좋은 반품 서비스가 있다. 구입한 전자제품에서 하자가 있을 경우는 물론이고, 아무 이유없이 “그냥 마음에 안 든다”는 한국적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이대도 미국에선 구입 뒤 2주일 안이면 대부분의 가전제품을 교환-환불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교환-환불의 부담은 유통업체가 아니라 제조업체가 진다. 그러니 삼성-LG 입장에선 미국에서 애프터서비스 부담이 거의 없을지라도(모든 출장 애프터서비스에는 상당히 비싼 출장비가 기본으로 매겨지므로), 교환-환불 부담은 상당할 수 있다. “세임 세임”일 수 있다는 얘기다.
DMB와 내비게이션 기능 때문에 값이 1.5배나 높아졌다는 대답에 대해 국내 전문가들은 “단돈 3만 원이면 DMB-내비게이션 기능을 추가할 수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불만이 터져나와도 삼성전자의 가격 정책은 그 뒤 거의 바뀌지 않았다. 미국에선 추수감사절(11월의 대형 쇼핑시즌), 크리스마스 등을 맞아 가격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이렇게 대기업 가전제품의 값이 ‘소통 불능’ 상태인 이유는 국내 가전 시장의 95% 이상을 삼성-LG 두 대기업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생산에서 유통까지를 대기업이 모두 독차지한 상태에서 아무리 불만이 높은들 한국인 소비자들은 다른 물건을 살 방법이 거의 없고, 독점사업자 입장에서는 가격을 낮출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마트의 드림뷰 TV에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은 이런 철옹성 같은 가격구조에 틈을 냈기 때문이다. 이마트는 타이완의 가전업체에 주문생산함으로써 국내 대기업 TV의 ‘절반 값’에 물건을 공급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만드는 핸드폰과 TV가 한국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현상에 소비자들 울화통 터뜨려도, 시장 95% 장악한 대기업은 못 들은 척 하는 현상이 타파되려면… 중소기업이 수입한 TV라면 이틀 만에 5000대가 ‘완판’되는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품질-애프터서비스 등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마트라는 국내 굴지의 유통업체가 품질을 보장하고 애프터서비스까지 해결해 준다니 소비자들은 안심하고 ‘반값 TV’를 살 수 있었다. 똑 같은 사례는 2003년 미국에서도 일어났다. 삼성-소니-LG 같은 대형 가전업체들이 지배하던 미국 TV 시장에 작은 균열이 생긴 해였다. 타이완에서 태어나 미국 대학 졸업 뒤 미국의 모니터 업체에서 일하던 윌리엄 왕(1963년생)은 이때 자신이 타이완에 주문해 만든 TV를 들고 미국의 대형 회원제 염가양판점 코스트코(Costco) 본사를 찾아간다. 그는 46인치 플라스마 TV를 3800달러에 공급할 수 있다고 코스트코의 구매 담당자에게 말한다. 당시 대형 가전업체 TV의 절반 값이었다. 그의 터무니없는 제안에 코스트코 경영진은 처음엔 그냥 웃고 말지만, 왕 사장의 끈질긴 시도에 2003년 2월 왕 사장의 비지오(Vizio) 브랜드 TV를 10개 점포에서 소량 시험판매해 본다. 결과는 대박. 곧바로 코스트코는 미국 전역의 320곳 코스트코에서 비지오 TV를 팔기 시작했다. ‘괜찮은 품질에 값은 절반’이라는 비지오 TV는 그후 꾸준한 판매 상승세를 보이면서 급기야는 삼성, 소니 같은 대형 업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시장조사업체 아이서플라이(iSuppli)가 올해 3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 4분기에 비지오가 미국에서 판매한 LCD TV는 모두 287만 대로 전년 동기의 184만 대보다 무려 78.9%나 늘어났으며, 미국 내 시장점유율 27.6%로 2위 삼성의 20.2%와의 격차를 더욱 벌린다. 생산시설 하나 없는 ‘가전제품 기획 수입업체’ 비지오가 ‘거인’ 삼성, 소니, LG를 판매댓수에서 제압한 결과였다. 비지오의 가격파괴 덕에 미국 시장에서의 TV 가격은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였다. 아이서플라이가 올해 8월 발표한 미국내 LCD TV 값 동향 자료를 보면 2010년 7월 평균 1318달러였던 40~42인치 TV 값이 1년 뒤인 2011년 7월에는 1003달러로 24%나 뚝 떨어졌다. 불과 1년만에 값이 4분의1 만큼이나 줄어든 현상이다. <표 참조>
이미 미국의 최다 TV 공급자가 된 비지오의 제품은 값은 절반이지만 품질도 절반인 것은 아니다. 미국 최대의 품질평가 매체 컨슈머리포트의 LCD TV 품질평가에 따르면 상위 15개 TV에서 물론 삼성, LG, 소니 같은 대기업 제품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하지만 비지오 제품 역시 3개(9, 13, 15위)나 이름을 올려 품질 측면에서도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비지오의 성장사는 ‘몸무게가 가벼운 수입 기획사가 대형양판점과 손잡고 기획상품으로 공룡 가전업체에 위협을 안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유통망을 장악한 기업의 기획이 소비자 물가 하락에 얼마나 크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마트의 드림뷰 TV가 일으킨 작은 파문에 기대를 품게 되는 이유다. ‘신생 기업에 프렌들리’한 경제라야 소비자들이 공룡들의 횡포에서 일부나마 벗어날 수 있는데, 한국에선 ‘대기업에만 비즈니스 프렌들리’ 하니… 미국 경제가 파산 일보직전까지 갔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소비자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도 ‘공룡 재벌이 지배하는 한국 경제’보다 나은 측면도 있다는 점을 비지오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반값 TV를 내놓은 비지오는 어느덧 미국 TV 시장의 ‘메이저 플레이어’가 됐다. 연간 수백만 대의 TV를 공급하는 업체로서 비지오의 TV 값은 아직도 메이저 메이커보다는 싼 편이지만 초창기처럼 ‘파격적 반값’은 아니다. 그러자 또 그 뒤를 이어 최근에는 에이펙스(Apex), 엘리먼트(Element) 같은 신생 기업들이 ‘진짜 반값 TV’를 월마트, 타겟 같은 대형 마켓에 공급하고 있다. 신생 기업이 양판점과 손을 잡고 끊임없이 가격판매에 나서는 양상이며, 1년에 TV 값을 25%나 뚝 떨어뜨리는 원동력이다. 저렴한 가격에 일정 품질을 보장하는 물건을 들고 나서는 신생 기업에 대형 마트들이 도움을 주는 이러한 전략을 진정한 ‘비즈니스 프렌들리’라고 할 수 있다. 재벌-대기업에만 정부-관청이 특혜를 주는 ‘한국적 뒤틀린 비즈니스 프렌들리’와는 다른 양상이다. 유통 대기업 이마트가 ‘반값 TV’로 일으킨 제조 공룡기업과의 투쟁이 소비자들로부터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미국의 비지오처럼 소비자에게 도움을 주는 유통혁명으로 자리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