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① 향림, 그대는 도대체 어디에?

초석 더듬으며 이름 찾아주려는 마음을 절터는 알까

  •  

cnbnews 제250호 김맹녕⁄ 2011.11.28 11:29:57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3번 출구를 나선다. 야채와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삶이 언제 보아도 활기차다. 과일도 몇 개 사서 배낭에 넣는다. 연서쇼핑센터를 끼고 우회전하면 기자촌, 북한산성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길건너에는 재래시장인 연서시장(延曙市場)이 있다. 왜 이 동네는 돌림자(字)가 ‘연’일까? 연신내, 연서쇼핑, 연서시장….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보면 개성부유수 유계문(비오는 방에서 우산 쓴 비우당 일화의 주인공 청백리 유관 대감의 아들)이 행궁에 문안 오다가 영서역(迎曙驛)에 이르러 노상에서 갑자기 죽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開城府留守, 至是來問起居于行宮, 至迎曙驛路上暴卒). 이 영서역이 지금의 연신내 네거리 아랫동네(대조동 49-24)에 있었다. 영서역은 세종 때부터 연서역(延曙驛)이라고도 불렀는데 인조 이후에는 영서역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楊州牧)조에 보면 영서역은 찰방(察訪)이 관리하는 큰 역으로 주변 6개의 역을 관할하는 곳이었다.(在州西六十里 察訪本道屬驛六). 이렇듯 ‘연서’라는 지명은 연서역에서 나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연신내’는 대체 어디에서 온 지명일까? 연신내, 연서시장 등 연자 돌림 이름이 이 지역에 많은 이유는 뭘까. 어떤 이는 ‘지각한 신하’가 있어 그렇다고 하지만, 이 지역이 영서역 관할 구역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어떤 이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 인조반정의 주인공 능양군(후에 인조)의 별서(別墅:농막)가 연서역 근처에 있었다. 반정에 참여하기로 한 장단부사 이서(李曙: 후에 남한산성 축성 책임자)가 늦게 도착하여 능양군의 애를 태웠다. 모이기로 한 냇가(川)에 늦게(延) 온 신하(臣)가 있어서 그 개천을 연신내(延臣川)라 불렀다는 그럴듯한 스토리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 이야기는 재미는 있는데 허점(虛點)이 있다. 이 스토리텔러는 연(延)자와 영(迎)자가 같은 뜻임을 간과하였다. 연(延)은 지체하다, 늘이다 등의 뜻 이외에 ‘맞이하다’라는 뜻이 있어서 ‘새벽을 맞이하는 역’으로 쓰는 데는 연서역(延曙驛)이나 영서역(迎曙驛)이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옛 분들의 지명에 대한 의식이었다.

아마도 연신내라는 지명은 이곳을 지나는 불광천의 지천(支川)을 ‘연서내’라 부르면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 발음이 자연스럽게 연서내 → 연선내 → 연신내로 바뀐 것은 아니었을까?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북한산 방향으로 향한다. 불광중학교에서부터 오늘의 답사를 시작하려고 한다. 걸으면 10여분이 걸린다. 마을버스도 있다. 불광중학교를 지나면 시범화장실이 있는데 뉘 집 별장처럼 아름답다. 지나는 이 즐거우라고 음악도 틀어 준다. 잠시 후 산 입구에 닿는데 자그마한 절이 자리잡고 있다. 불광사이다. 흘깃 들려 보기로 하고 범종각 아래를 통해 절마당으로 들어선다. 주련이 보인다. 聞鐘聲煩惱斷(문종성번뇌단) 이 종소리 들으시고 번뇌를 끊으소서. 智慧長菩堤生(지혜장보리생) 지혜가 자라고 보리심을 발하소서. 離地獄出三界(이지옥출삼계) 지옥고를 여의고 삼계를 뛰쳐나와 願成佛度衆生(원성불도중생) 원컨대 성불하시고 중생 제도하옵소서. 저녁종 소리 듣고 지혜를 얻으라고 일러 주시는구나. 절문을 나선다. 족두리봉 능선과 향로봉 방향으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서 있다. 향로봉 방향으로 방향을 잡는다. 시작부터 바위길이다. 길은 평이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서 잘 다듬어 놓았다. 산길 접어드니 운동시설들이 정비되어 있고 앞으로 펼쳐진 산세(山勢)가 신선함을 선사한다. 아, 이 터에 자리하던 절 그 이름이라도 알 수 있다면…, 흩어진 기와 어느 조각에서 명문(銘文) 한 자 나오기라도 한다면…. 갈림길 없이 외길을 타고 오른다. 건기(乾期)라서 수량이 거의 없는 골자기를 30여 분 걸으니 ‘좌로 향로봉 우로 족두리봉’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다. 근처에는 향림담(香林潭)이라고 써 놓은 아주 작은 담(潭)이 있다. 전에는 그 옆으로 파이프를 통해 나오던 샘물이 있었는데 수질이 나빠졌는지 폐쇄해 버렸다. 이 골자기로 잠시 오르면 좌측으로 오래된 석축이 나타난다. 그 위로는 이제 이름도 잊힌 수백 평은 실히 될 만한 옛절터가 있다. 소나무를 빽빽이 조림해 놓은 그늘 아래 주춧돌과 기와 쪽이 흩어져 있다. 무심한 산객(山客)들은 그 그늘에 앉아 점심식사를 즐기고 있다. 아, 이 터에 자리하던 절 그 이름이라도 알 수 있다면…, 흩어진 기와 어느 조각에서 명문(銘文) 한 자 나오기라도 한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글 한 줄 읽어 보자. “향림사(香林寺)는 삼각산(三角山)에 있다. 고려조 현종(顯宗) 경술년 난리에 태조의 재궁(梓宮: 관)을 이 절로 옮겼다가, 7년 병진에 현릉(顯陵)으로 환장(還葬: 도로 장례 모심)하였으며, 9년에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다시 내침하자 여기에 이안(移安)하였다가, 10년에 다시 현릉으로 모셨다. (在三角山 高麗顯宗庚戌之亂 移安太祖梓宮于是寺 七年丙辰還葬顯陵 九年契丹蕭遜寧來侵又移安是 十年復葬顯陵)” 삼각산에 있는 향림사에다가 거란이 침공하자 고려 태조 왕건의 관을 두 번이나 옮겨 숨겼다는 것이다. 향림사는 고려 왕조로서는 그만큼 믿을 만했고 또 은밀한 곳이었을 것이다.

북한산성 축조에 큰 몫을 한 성능(聖能)스님의 북한지(北漢誌)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한 줄 설명이 더 있다. “향림사는 비봉 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香林寺 在碑峰南 今廢)” 이 절터 뒤, 지금은 향로봉(香爐峰)이라 부르는 봉우리는 옛 기록에 향림사 후봉(香林寺後峰) 또는 향림봉이라 부른 봉우리였다. 또한 언제부터 누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로 곁에 향림담(香林潭)도 있어 이 절터를 향림사터로 비정(比定)하는 학자들이 있다. 필자도 간절히 그러기를 바란다. 절터 초석을 매만지고 깨진 기와조각을 더듬으면서 이름이라도 찾아 주고 싶은 마음을 이 터는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향림사터라고 단정하기에는 무언가 마음 속이 석연치 않다. 인도의 아쇼카왕보다 더 뛰어난 정복과 교화를 꿈꾸었던 동방의 ‘The King’ 진흥왕의 꿈과 기운이 이 곳 비봉 남쪽에 살아 있으니… 아쉬움을 남기고 절터를 떠난다. 향로봉 방향을 버리고 이정표가 가리키는 족두리봉 방향으로 간다. 나침반 방향으로 서남쪽인데 탕춘대성이 시작되는 향로봉 남쪽 길이다. 길은 잘 다듬어져 있다. 북한산 어느 길인들 열려 있는 길은 모두 잘 다듬어져 있다. 이윽고 고갯마루에 닿으면 감돌아 저 너머로 가는 길이 참으로 아름답게 휘어져 있다. 북한산길 중 몇 안 되는 꿈을 감춘 길이다. 끝없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길이지만 그것도 잠시, 길은 탕춘대성(蕩春臺城)이 시작하는 시점(始點)으로 연결된다. 여기서부터 성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걷기 아름다운 길, 탕춘대 능선길이다. 이 길 잠시 아래 포금정사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있다. 바로 위쪽(북)은 향로봉이고, 우측(북동)으로는 비봉(碑峰)이 보인다. 서기 568년에 한강가 땅을 점령하고 세웠을 진흥왕순수비의 모형이 내려다본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인 인도의 아쇼카왕이 세 번을 세우려다 실패하고 온 세상을 다 다녀도 아무도 세울 수 없었던 장륙존상을 완성해 선덕여왕이 황룡사에 모실 수 있게 했다는 이가 진흥왕이다. 그는 아쇼카왕보다 더 뛰어난 정복과 교화의 왕을 꿈꾸었던 동방의 ‘The King’이었던 것이다. 그 꿈과 기운이 이 곳 비봉 남쪽에는 살아 있다. 10여 분 뒤 포금정사터에 닿는다. 향로봉과 비봉 품에 아늑한 보금자리이다. 터전은 크지 않다. 오래 된 주춧돌이 이 터의 나이를 말해 준다. 근세에 축대도 쌓고 층계도 놓아 옛절터 흔적을 많이 훼손시켜 놓은 곳이다. 층계를 오르고 오르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 약수가 있다. 김신조 침공 이후 폐사되어 오랫동안 절터로 남아 있다 보니 관리가 되지 않아 약수에는 ‘음용불가’ 딱지가 붙었다. 아쉽구나, 얼마나 시원하던 약수인데….

옆 계곡에는 맷돌 한 짝이 처박혀 있다. 축대도 많이 무너져 내렸다. 이곳에 올 때마다 궁금하기 짝이 없는 절터이다.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근세에 옛절터에 포금정사라는 절을 세웠을 것인데 그 때 본래 자리를 많이 훼손시킨 것 같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은 몇 개의 주춧돌과 장대석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포금정사터에 있는 약수는 드물게 쉽게 마르지 않는데, 김신조 침공 이후 폐사된 뒤 관리 않으니 못마시게 돼. 아쉽구나, 얼마나 시원하던 약수인데…. 향림사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비봉 남쪽에 있었다는 절(在碑峰南). 또한 선조실록 29년(1596년) 3월3일 조에는 병조판서 이덕형이 중흥동산성을 둘러보고 지도를 그려 보고한 내용이 있다. “문수봉으로부터 세 봉우리가 서쪽으로 뻗어내려 동구의 외성에 일어난 곳, 즉 앞에 이른바 서남쪽의 최고봉과 서로 접하게 되는데 형세가 극히 험악합니다. 문수(文殊)·승가(僧伽)·향림(香林) 등의 절이 산허리에 나열해 있는데(文殊、僧伽、香林諸寺, 羅列于山腰), 우이동·사을한리와 경성의 사현(沙峴)·홍제원(弘濟院)의 좌우 도로가 역력히 한 눈에 들어옵니다.” 포금정사터는 비봉 남쪽에 있다(향림담은 서쪽). 향림사가 문수사, 승가사와 같이 산허리에 나열되어 있으려면 같은 산세에 있어야 한다. 문수사, 승가사, 포금정사는 같은 품에 있다(향림담은 산 너머에 있다). 또 하나, 거란의 침공을 피해 태조 왕건의 재궁을 숨기려면 적어도 쉽게 찾지 못할 은밀한 곳이 아니었을까? 향림담 옆 절터는 아무래도 송도(개성)에서 남진하는 길(지금의 통일로)에 너무 노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일찍이 이숭녕 선생은 포금정사터를 향림사터로 비정(比定)하였다. 아직은 단정하기에 너무 이르다. 이 길을 갈 때마다 묻고 또 물어야겠다. 향림사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포금정사터를 떠나 다시 탕춘대성길로 돌아온다. 성길을 따라 남으로 계속 내려온다. 북한산 둘레길을 이 길 일부에 설계해 놓았다. 도중에 암문을 만나는데 이 문으로 빠져 나가면 녹번고개로 연결된다. 북한산 종주를 길게 하고 싶을 때는 이 길로 오르면 좋다.

잠시 후 상명대 담을 만나고 여기에서 성길을 버리고 좌로 상명대 담을 접하며 내려온다. 구기동 옛동네 골목길이다. 20여분 내려오면 세검정초등학교에 닿는다. 교정에는 오래 된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너무도 쓸쓸한 당신’ 모습으로 을씨년스레 서 있다. 이곳이 신라 때 절 장의사(壯義寺)터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이 절의 유래가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奇異篇)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자. 거란의 침공을 피해 태조 왕건의 재궁을 숨겼다는 향림사터를 이숭녕 선생은 포금정사터로 비정(比定)했지만, 아직 단정하기엔 이르다. 이 길을 갈 때마다 묻고 또 물어야겠다. “처음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장춘랑(長春郞)과 파랑(波浪)이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후에 백제를 칠 때 그들은 태종(太宗)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신 등이 옛날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이제 백골(白骨)이 되어서도 나라를 완전히 지키고자 종군(從軍)하기를 게으르지 않습니다. 하오나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의 위엄에 눌려서 남의 뒤만 따를 뿐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우리에게 약간의 군사를 주십시오.’ 대왕(大王)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魂)을 위하여 하루 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佛經)을 읽고 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그들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황산벌 싸움에서 백제 계백장군 군사에게 죽은 두 화랑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절인 것이다. 연산군 때 폐사되고 그 후 군사기관인 총융청이 되었다. 이 지역 신영동은 영조 때 총융청이 이전해 옴으로 생긴 지명이다. 총융청유지비를 뒤로 하고 큰 길로 내려온다.

길옆 담장 아래 조지서(造紙署)터를 알리는 유지비(遺址)비가 초라하게 서 있다. 한 때 궁중에서 쓸 최고의 종이를 생산하던 곳이다. “조지소(造紙所)는 장의사동(壯義寺洞)에 있다. 처음에는 사대(事大)의 표(表)·전(箋)·주(奏)·계(啓)·자문(咨文)에 쓸 종이를, 전라도 전주(全州)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세밑에 바쳤는데, 많이 쓰는 것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금상 2년에 특명으로 조지소를 두어 종이를 만들었는데, 품질이 옛 것에 견주어 훨씬 곱고 좋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주와 남원 두 부(府)의 세공(歲貢) 독촉의 폐단이 비로소 없어졌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이다. 조지서터에서 상명대 방향으로 100m 내려오면 세검정이 있다. 소위 인조반정군이 반정에 성공한 후 칼을 씻었다(전쟁 끝)는 곳이다. 앞쪽으로는 연산군이 즐겨 놀던 탕춘대 언덕에 빌라가 서 있고, 해가리개(遮日) 천막을 세웠던 차일암에 이제는 빈 바람만 지나간다. 옛날 조선왕조의 실록이 완성되면 사초(史草: 초안 기록자료)를 씻던(洗草) 곳이다. 이제 세월은 기억마저 씻어 갔다. 내려가 내 손을 씻는다.

교통편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3번 출구, 6호선 독바위역 1번 출구 답사코스 불광사 ~ 향림사터 ~ 포금정사터 ~ 탕춘대성 ~ 세검초(장의사터) ~ 조지서유지비 ~ 세검정(탕춘대터·차일암·세초지)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